코로나 시대의 청년들(4) #수많은 성장들, 그 중의 하나
나의 어릴 적 꿈은 서울로 가는 것이었다. 고향은 하고 싶은 것 많은 나에게는 너무 좁고, 제한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의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느껴 취업의 눈을 서울로 돌리게 되었다. 그때 든 결심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니, 언젠가 떠날 것이라면 하루라도 젊을 때 떠나자.'였고 그 결심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처음 겪어보는 서울 생활, 타향 생활, 자취 생활, 독립 생활, 사회 생활 등은 여기저기 부딪히며 깨지게 되었지만 한 편으로는 큰 성장을 이룬 시기이기도 했다. 집에서 저절로 생길 것만 같은 수저를 내 돈 주고 사고, 무인도에 떨어뜨려놔도 잘 살 줄 알았던 사람인데 외로움을 느껴보고, 고장 난 물품을 집주인과 의논하고, 집을 보러 다니며 이사를 준비하고... 부모님이 주시는 편안함과 익숙함 속에 몸만 자란 어린이가 아니라,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느낌이 스스로도 들었다.
화초에 영양액을 주면 화초도 이런 느낌을 느낄까? 나라는 화초의 영양액은 '불안'이었다. 나의 성장은 불안을 먹고 쑥쑥 자랐다. 첫 회사에서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닥쳐온 불안은 또 다른 유형의 것이었다. 그동안의 불안이 '나 이대로도 괜찮을까?'의 느낌이었다면 그때의 불안은 '당장 이 일을 그만두면 내 월세는? 생활비는?' 같은 현실적인 것에 가까웠다. 당장 나의 의식주를 위해 나는 성장해야만 했고, 쉰다는 것은 사치로 느껴졌다.
이것을 나는 '강박성 성장'이라고 이름 붙였다.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68일의 시간만이 필요하다고 한다. 끝의 기약 없이 성장을 위해 달려왔던 시간들이 쌓여 이제는 습관을 넘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멈춤을 모르게 되었다. 어쩌다 생긴 자유로운 시간에도 할 것을 끊임없이 찾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체 모를 불편함이 찾아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그런 강박성 성장을 위해, 불편함을 지우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유튜브를 보거나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뒹굴거리는 시간까지 쓸모없다는 것은 아니다. 원체 체력과 지구력이 약한 사람인 것을 알아서, 충분한 잠과 휴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뿐, 오롯이 휴식을 위한 휴식을 해 본 적이 오래된 듯하다. 이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얘기한다. 쉴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가끔 머리가 터질 것 같고, 도무지 불가능할 것 같은 시간 관리에 맞닥뜨릴 때면 목덜미를 잡아 채 기절이라도 시키고 싶을 정도이지만 여전히 '성장해야 한다'라는 강박의 힘이 더 세서 느린 한 걸음이라도 옮기려 한다.
엄마는 가끔 말씀하셨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런 나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길 것, 즐기지 못한다면 스트레스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마다 나에게 외치는 말,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혹자는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능률이 오르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주어야 정말 잘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너무나 후자인 사람이다.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고 스스로를 몰아세울수록 효율이 떨어지는. 사람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싶어 한다고, 한때는 완벽주의 기질을 가지고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세워 찬란히 눈부신 결과물을 내보이는 사람들을 동경한 적이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방뿐인지라 그들을 따라 하려 스스로를 몰아세워봤지만 나에게는 하찮은 부스러기조차 남지 않는 오류뿐이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 어때, 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하는 것에 의의를 두자.'라고 포기하듯이 맘을 놓아버린 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을 경험한 뒤로는 어떤 일에 도전할 때마다 속으로 되뇌게 된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성장의 싹을 잘라버릴 수 있을 것 같던 말이 되려 성장을 촉진하는 이 아이러니.
인생이란 역시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다.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말은 결국 지쳐서 쓰러지고 만다. 그렇다면 어디를 향해서, 어디까지 달려야 하는가.
상경하면서 또 다짐한 것이 하나 있다면 '서른까지 진로를 정하자, 그전까지는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 서른 이후부터는 정한 분야에서 깊은 우물을 파자.‘는 것이었다.
올해 나는 29살이 되었다. 서른이 되었다고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무언가로 리셋하기에 조금은 늦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다른 분야에 이직을 한다고 쳐도, 30대 이상 신입은 면접관들이 꺼려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봤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성장의 방향과 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보람되며 지속 가능한 일거리를 찾는 것. 내가 일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보람된 일인가'이다. 돈 벌려고 하는 일인데 연봉이나 복지를 우선해야 하지 않냐고 물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이 옷이 맞는 옷 같다. 실제로 업무도 편하고 나에게 잘 맞는 일을 해보았는데, 일에 대한 보람이나 명분을 찾지 못해 퇴사한 적도 있고.
두 번째는 집을 사는 것이다.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며 집에 대한 열망이 커지게 되었다. 투자 가치, 재개발 이런 것은 다 모르겠다.
누군가 이렇게 표현하더라, '2년마다 이사 다니지 않을 자유'
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보람되고 지속 가능한 일을 찾으려 한다. 그때까지는 40대가 돼도, 50대가 되어도 나는 성장하는 중이겠지.
이렇게 활자화하며 나름대로의 성장 방향을 정했다고 생각하지만, 또 어따한 계기로 인해 모든 결심이 뒤바뀔 수도 있다. 지금도 충분히 흔들리고 있기도 하다. 하루에 몇 번은 ’이 길이 맞나? 나만 뒤처지거나 잘못된 길을 가는 게 아닐까?‘하며 불안해하기도 한다. 성장의 끝은 답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정답은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렇다면 어떤 답이든 정답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만든 대로 내놓은 답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찌그러진 지점토 같은 것이라도. 흔들릴 때마다 가슴을 쓰담쓰담, 어깨를 토닥토닥하며 나를 붙잡는 것 또한 나. 이런 방식으로도 성장하는 것도 나라는 것을 끝없는 나 뒤의 나 뒤의 나들이 받쳐주고 있다.
작가 : 사사이안
시를 쓰고 생각을 쓰기 좋아합니다.
세상을 바꿔버리고 싶다가도 죽은듯이 살고싶어지기도 하는 직장인입니다.
본 매거진은 청년들의 지식커뮤니티 눈랩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함께 작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