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청년들(9)_당신의 건강함은 누구의 기준이던가.
인생 사는 게 고통스럽고 죽을 것 같지? 맞아, 다 똑같이 하루하루 죽어가는 거야. 그런데 너희처럼 그렇게 죽는 건 아니지. 그렇게 죽으면 누가 알아줄 것 같아? 책임감도 없는 사회 부적응자들. 니들은 그냥 피해의식, 열등감에 쩔어있는 정신병자들이야, 알아?
(진희정, 기발한 자살여행)
푸핫. 제 발에 자기가 걸려 넘어진다더니. 진희정, 진희정, 그놈의 진희정! 그래. 열여덟의 가을, 나는 진희정이었다.
*
-십 대의 청춘. ‘참 좋을 나이지’로 대표되는 십 대를 거쳐 20대, 30대로. 사회적 기준에 따르면 우리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어른으로서 성숙해져야 했다. 열여덟, 나는 세계에서 내가 짱인 줄 알았고 열아홉, 나는 세계에서 내가 짱이어야 하는데, 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1을 지나 2를 향유하는 나는 과연 그때보다 성장한 걸까?
1. 나는 연기 입시생이었고 그 당시는 행복을 위한 불행이라는 생각으로 덧칠한 생 속에서 감정의 이름 없이 폭주하던 시기였다. 외적인 미를 기준으로 한, 다들 알면서도 모르는 차별적인 시스템을 마주했던 때. 그러나 더 큰 성공을 위해서는 이 불행마저도 달게, 아니 달지 않더라도 끝까지 삼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위해 참았다.
그들 중엔 나도 물론 있었고. 그 시작엔 다짐이 있었고 끝엔 공허함이 남았다. 응축된 욕구들의 예견된 폭격이었으려나, 입시 도중에 폭식증이 찾아왔고 거식증을 간절히 원했다. 아플 거라면 차라리 마르게 아프자면서. 그러나 내 간절함에도 앞자리 숫자는 3번 바뀌었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했다.
1과 2. 나의 열아홉, 스무 살 이야기는 내 단골 소재다. 반년, 폭식증과 건강 악화, 입시 실패, 쓰레기라는 낙인, 스토커, 우울, 대인기피, 3번의 구애와 실패, 자퇴, 가출, 누군가의 목숨줄을 쥐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순간들. 고작 반년 안에 이 모든 것들이. 이런 이야기들이야말로 핑계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가져다 쓸 수 있는 소스로 정말 딱이지 않은가.
2. 나는 달라. 모든 책임을 나에게 전가한 그들과는 다르다고. 취기에 기대 그 시절을 밀어내려 수많은 타인들을 붙잡았다. 내 얼굴을 잊을 그들에게 내 노력을 내주었다. 그렇게 잊었다. 잊어냈다. 앳된 얼굴로 거울 앞에서 해맑게 웃던 모든 노력들을 마침내, 잃어버렸다.
-책임감도 없는 사회 부적응자들. 니들은 그냥 피해의식, 열등감에 쩔어있는 정신병자들이야, 알아?
2. 알아, 알아, 안다고! 나도 다 알아, 내가 피해의식 덩어리라는 거.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거! 결국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졌다.
여전히 2. 분명 하나의 단어로 수렴될 수 없는 감정임에도, 나열하기엔 피곤한 감정들 끝에 모든 것이 무로 정의된 현재에 다다랐다. 우주다. 현재는 우주였다. 우주는 새까만 세계다. 여기선 그 누구도, 무엇도 죽어있음으로 정상이다. 다들 그런 경험 하나씩은 있지 않나. 저물어가는 것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간절하게도 잊어낸 상실들. 나의 순간들은 생의 상실 속에서 존재하고 있을까? 나를, 내 울부짖음을 별것도 아닌 것에 구질구질한 사람으로 정의하던 누군가. 그들에게서 분리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상실한 공허함이 또 다른 처참함으로 생을 붙잡았다. 생에 대한 절박함으로 죽음을 말하는 이들. 그런 이들과 자신을 분리해냄으로써 생에 절박한 이들. 그 모두가 다르던가?
-인생 사는 게 고통스럽고 죽을 것 같지? 맞아, 다 똑같이 하루하루 죽어가는 거야. 그런데 너희처럼 그렇게 죽는 건 아니지. 그렇게 죽으면 누가 알아줄 것 같아? 책임감도 없는 사회 부적응자들. 니들은 그냥 피해의식, 열등감에 쩔어있는 정신병자들이야, 알아?
아.
나는 그녀였다. 자살을 원하던 그들에게서 그 자신을 보던, 스스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처절히 삶을 갈망하던, 그녀였다.
*
어린 시절의 나는 영민한 아이라 불리었고 청소년기의 나는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버려졌다. 나를 지칭하던 단어들이 모든 방면의 나를, 그 입체성을 아우른다고 볼 순 없더라도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나는 운이 좋았다. 여러 좌절과 방황에도 살아있고, 그 여정에서 나를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들을 마주했다. 그 덕에 나만 보고 남 탓만 하던 10대를 거쳐 남을 지키려 내 탓만 하는 1과 2의 경계에서, 결국 ‘함께’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어 지니 말이다.
결국 오늘도 저물어가고 있다. 언젠가 이 상실을 그리워하고 온전히 비워내는 과정을 맞이하고 있겠지. 그렇기에, 모든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 나는 누구보다 건강했다. 아팠으나 건강했다. 어떤 소화기관으로도 흡수시킬 수 없는 감정과 이성들은 여과 없이 토해냈으니. 그렇다면
당신의 건강함은 누구의 기준이던가,
(기발한 자살여행 : 핀란드의 대표적인 소설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각색한 연극. 각기 다른 사연 속의 주인공들이 모여 자살여행을 기획하고, 그 여행에 끼어있던 한 기자의 잠복근무로 인해 소동이 인다. 여기서의 진희정은 그 기자로서 자살하고자 하는 모두를 비난하는 역할. 필자는 18살에 소규모 연극단에서 ‘기발한 자살여행’의 진희정 역을 맡은 바 있음.)
작가: 빌린이
본 매거진은 청년들의 지식커뮤니티 눈랩(noonlab.org)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함께 작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