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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팀덕 Mar 23. 2022

25살, 편입(2)

이별

공익 생활을 하며 공부를 하다 보니 금방 여름이 다가왔다.

이제 편입영어에도 조금 더 적응이 된 것 같아 학원의 상위권 반으로 옮겨 공부를 이어나갔다.

확실히 여름이 되고 대학생들이 방학을 하자 편입생 유입이 많이 된 듯했다.


방학이 되니 학원도 더욱 타이트해졌다. 대부분의 편입생들이 학교생활과 병행을 하며 시험을 준비하다 보니,

비교적 시간이 많은 방학을 이용해 단기간에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갑자기 숙제나 시험 같은 것들이 불어나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여전히 똑같은 스케줄인데..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시간이 많이 빠듯해졌다.


사무실에서 1년 정도 다 돼가는 시간 동안 있다 보니, 이제 뭐 일은 물론이거니와 직원들과도 많이 친해져

거의 정직원 수준(?)의 인식이 사무실 내에서 굳어졌다. 그렇게 매일 정해진 일들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무실 정문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QR코드 안내와 발열체크를 하고 있었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평소와 같이 안내를 하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물었다.


"공익이에요?"


솔직히 속으로는 또 시비를 거는 사람인 건가 싶었다.

간혹 민원인들 중에 괜히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는데,

처음에 이 아주머니의 어투가 살짝 호전적이어서 괜히 그냥 만만해 보이는 나에게 화풀이를 하려는가 싶었다.


"네, 맞습니다."

"아, 우리 아들도 여기서 근무했었거든요."

"오! 정말요?"

"응. 여기서 4년 전쯤에 근무하다가 죽었어요."


그녀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나에게 이 말을 남기고 번호표를 뽑으려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누가 뒤통수를 한 대 때린 듯이 멍해졌다. 그리고서는 조금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사실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꼭 기회가 된다면 그녀와 대화해보고 싶었다.


내가 근무하는 동사무소에는 과거에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지금도 인터넷에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건이다.

공익 근무 중에 안타까운 선택을 하신 분이 이 사무실에 4년 전에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근무 시작하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 사건이 내가 근무하는 이곳에서 있었던 사건인 줄은 몰랐다.

그냥 단지 '서초구청 공익 자살사건' 정도로, 본청에서 일어난 일인 줄만 알았다.


지금의 근무지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나중에 직원들의 입에서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기사를 제대로 읽어보았다. 과연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에서 일어났던 일이 맞았다.

적잖이 충격이었다.


사람이 죽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사실 이 사무실에 그 사건 당시 있었을 직원들도 이제는

없을 터인데 괜히 직원들이 잠깐 미워지기도 하고 이 사람들을 바라볼 때 상당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빽빽이 앉아있는 민원인들에게도 괜스레 화가 나기도 했다.

그 많고 많은 동사무소 중에 왜 맨날 여기만 와서 다들 이렇게 난리를 치고 욕을 해대는지 모르겠다.


근무하는 동안 이 사건 때문에 내 마음속 한편이 불편했다.

언젠가 꼭 그 분과 단둘이 살았다던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마침내 그분이 내 눈앞에 서있었다. 꼭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그녀는 필요한 서류를 창구에서 신청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어머님, 아드님 일은 참 유감입니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실제로 뵙게 되어 좀 놀랐습니다."

"고마워요. 공익 한지는 얼마나 됐어요?"


그 이후 우리는 대화를 한 30분 정도 했다. 안타까운 사건의 자초지종을 더욱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연거푸 이 사건의 시비를 떠나 조의를 표했다. 얘기 중에 결국 어머님은 눈물을 보이셨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은 어머님의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런 일 생겼다는 거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여기서 근무하는 동안 아드님 계속 잊지 않고

생각하면서 근무하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끝으로 짧게 어머님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내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노트북을 켜고 이 사건에 대해 더 찾아보고 읽어보았다.


내가 몰랐던 더욱 안타까운 사실들이 있었다.

괜히 무력해지기도 했다.


'당시 그날 내가 이 사람과 같이 근무하고 있었다면, 그날의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 사람에게 폭언과 욕설을 했다는 민원인은 자신의 말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까?'


여러 이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의미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들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의 시비를 가리는 것보다도

그냥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어머님의 상실에 유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또 지나갔다. 날은 갈수록 더워졌지만, 다행히 이전의 걱정과는 다르게

체력적으로 그렇게 부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해진 스케줄대로 생활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그냥

빨리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반에서도 다행히 계속 상위권을 유지했다. 처음에 어렵다고 느껴지던 단어나 문법 같은 경우에도

이제는 제법 이해도가 늘어나고 요령이 생기니 예전보다는 능숙하게 문제를 풀어내었다.


공부를 한창 하고 있으니 이사 가는 날짜가 점점 다가왔다.

2년 동안 잠시 동안 떠났던 동네로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이사하는 날 아침에 비가 엄청 쏟아져서 좀 애를 먹긴 했지만, 무사히 이사를 끝마쳤다.


이사 후 3주 정도 지나 새로운 집에서의 생활에 적응을 하고 있을 때쯤,

근무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부모님이 갑자기 시골로 내려간다는 연락을 하셨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부모님이 3일 정도 서울로 다시 올라오지 않으셨다.

그 후 나는 할머니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의식을 잃으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주무시던 와중에 혈관이 터져 골든타임도 다 놓치고 지금 며칠째 의식이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대학병원으로 이송이 되었으나, 그곳의 의료 시스템이나 설비들로는 지금 어떻게 할머니에게 조치를

취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워낙 연세가 많으시니 서울로 할머니를 모셔오는 와중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고 발생한다 해도 대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크게 의미가 없는 연명치료만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직은 할머니가 발가락 쪽에는 조금 반사 반응을 보이신다고 했다.


그러나 모두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함에는 분명했다.


아빠는 매일같이 시골에 내려가셨고, 우리 가족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돌발상황에 항상 준비를 했다.

그러던 와중, 아빠에게 할머니가 고비이실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는 바로 차를 끌고 시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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