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새로운 곳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죽을 것 같았던 13시간의 비행 끝에 나는 새벽의 공항에 홀로 도착했고 겨우겨우 살았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환대는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고 아무도 내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적당히 이용당하며 버텨보았지만 이겨낼 힘이 없었다. 그때 내가 처음 시작했던 것이 운전이었다.
운전면허만 있었지 한국에서도 해보지 않은 운전을 외국에서 하려니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운전하는 시간만큼은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도, 비난하는 사람도, 주물럭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밥은 굶어도 자동차의 기름만큼은 언제나 부족하지 않게 채워두었다.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고 고속도로를 달려 도서관에 가고, 미술관에 가고, 공원에 갔다. 그러다 견딜 수 없을 때면 한국인이 하나도 없는 성당에 가서 울고 오면 그만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를 보며 혼자 차를 운전하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면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창문도 겨우 손으로 돌려야 열리던 낡은 도요타 중고차. 덜컹거리는 시동이 걸릴 때면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서 마음이 두근거렸지만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는 일상이 전부였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 운전하는 시간을 좋아했구나 영화를 보며 새삼스레 깨달았다.
영화 속에서도 한없이 자동차가 달리는 장면들이 참 좋았다. 밤길을 운전하며 주를 통과하던 여행도 떠오르고, 야간버스를 타고 덜덜 떨면서 넘었던 국경도 떠오른다. 그때는 그토록 겁을 내면서도 용감했던 내가 왜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는 겁쟁이가 되었을까. 아마 지금은 지키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죽음 그 자체가 두렵기보다 내가 죽음으로서 슬퍼질, 불행해질 얼굴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 나와 너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살아가야 해”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고통 속에서 혹은 슬픔 속에서. 그 어느 것도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웃고 떠들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가끔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다.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이토록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어서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영화가 끝나고 운전하는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아빠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새벽에 길을 나서는 아빠의 트럭이, 쌓여있는 캔 커피가,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트로트 음악 속에서 나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자동차 시트에 석유 냄새가 깊이 배어 있어 인상을 찌푸리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느낀다. 언젠가 혼자 자동차로 여행을 다시 떠난다면 그 어둠 속에서, 바람 속에서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