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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선 Oct 30. 2019

슈퍼맨을 고발합니다.

내 안의 슈퍼맨과 싸워 이기기

슈퍼맨 때문에 정말이지 너무 힘들어서 고발 즘 해야겠다.

갑자기 영어로 쓰인 두꺼운 매뉴얼을 가져와서는 최신 업데이트된 안전 방침이니 당장 외우지 않으면 오프로드(Off Load)라고 겁을 줬다. 비행 스케줄에서 제외되어 강제로 비행기를 못 탄다는 의미다. 승무원이 비행기에서 일해야지 못 타면 어딜 가나 집에 가겠지.

비행 전 브리핑에서 비행에 대한 안전 지식을 모든 승무원에게 물어본다. 비행의 보안, 응급 처치 지식 등에 관련한 지식이 준비가 안 되었다고 판단되면 비행하러 못 가게 될 수 있다. 비행기 기종이 바뀌어서 승무원들이 필요가 없거나, 기종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승무원들에서 새로운 승무원들로 교체되어 비행기에 들어오는 경우를 포함한다.

간이 쫄깃한 비행은 더는 못하겠다더니, 비행말고 여행만 하며 살고 싶댔다고 했다가 어떤 날은 잠을 한숨도 못 자서 피곤해 죽겠단다. 라면을 겨우 하나 요리라고 해먹고 선 하루 종일 자고, 밤이라 또 잔다. 일상이 종잡을 수 없이 불규칙적이라고 스스로 한심하댄다.

그래도 슈퍼맨은 자기 맘대로 리모컨에 붙은 서비스 콜벨을 시도 때도 없이 눌러 이리저리 왔다 갔다 그녀를 고생시키는 중이다. 내가 슈퍼맨 이었다.


9년간 비행을 하다가 한국에 오자마자 2주 만에 승무원 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취업 준비생들에게 승무원이 될 수 있다고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마치 되는 게 쉽고, 되고 나서도 인생이 완전 풀리는 마법처럼. 사실은 실제로 해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퇴사 후 다른 걸 해보겠다고 항공사를 그만둬놓고 K 항공사에서 최종 면접까지 갔으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내가 봐도 너무 말수가 적어서 탈락, I 회사의 1차 면접에서는 지금 무슨 일 하느냐고 질문을 받았는데 도자기 만든다고 신나서 도자기 이야기만 하다가 탈락, 내 맘대로 다 될 것만 같은 것들이 이젠 내 맘대로 안되어갔다. 내 나이 벌써 4n 살. 남들은 결혼 잘해서 외제 차에다 애도 낳고 잘 사는데 난 커리어 우먼이 끊기면 안 된다고 또 구직활동과 구애 활동을 하는 걸 보니, 별 볼 일 없는 삶을 인정해야 했다. 난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승무원이 아니어도 여행을 많이 하겠다는 둥, 부자 남자와 신분 상승하는 결혼을 하겠다는 둥, 아티스트가 되어 해외 전시를 매년 하겠다는 둥, 부푼 기대만큼 터져버릴 듯한

10대 소녀의 엉덩이 같은 엉뚱한 일을 벌였다. 장기 목표라 아직은 현재 진행 중이니 시간이 좀 걸립니다요. 제대로 자랑할 만한 것도 보여줄 만큼 대박이 난 것도 없다.

책이 나오면 인세로 얼마나 벌까 싶었다. 여행은 시간 강사로 일주일에 3일만 해서 그거라도 벌려고 애매해서 가지도 못하고, 공방은 월세가 나의 열정과 재능을 삼켜 먹을 듯 높아 그만두기로 했다. 틈틈이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있었는데 승무원 채용 공고가 나면 자동 반응을 보이다가도 이제 젊은 사람들 하라고 컴퓨터를 덮었다. 여전히 구직 정보 키워드 검색에 우선 승무원이라고 쓰고, ‘이제, 그만 좀 하자’라고 읽는다.

자려고 누웠을 때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뚫어지게 보다 동공이 확장되어 피곤해질 때까지 뭔가를 찾는 삶이 또 시작됐다. 다른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해서 키워드를 생각하니 할 수 있는 게 은근히 없었다. 회사를 들어가기에는 안 맞는 사람인지라. 이제 일을 그만해도 되겠다 싶은 날이 내게는 언제쯤 올지. 아무리 준비를 하고 퇴사를 해도 새로운 일을 결과에 상관없이 행동하지 않으면 다시 제자리다. 해내는 삶에 익숙해진 가만히 있고는 못 사는. 한 마디로 지고는 못 사는 가보다.

승무원 때 보다 육체노동이 10%도 안 되는데 더 피곤했다. 마음이 쉬지를 못한다. 이력서에 한 줄 더 쓸 수 있는 경력이 생겼지만, 그만큼 나이도 늘었다. 한국에서 자리 잡기에 나이가 문제없는 일을 하기로 했다. 만약 내가 남자라면 내 여자를 이렇게까지 고생을 시킬 수 있을까?

겉보기에는 나는 별 볼 일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 시간제 시간 강사라도 승무원 강의가 있는 게 어디냐. 열심히 글쓰기 수업을 통해 갈고닦은 실력으로 출판사에 직접 원고 투고를 하여 당당히 계약해 책도 냈으며, 외국인 영어 도예 수업도 했었다. 하지만 내 안의 슈퍼맨은 만족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여유를 내어 여행이라도 가려고 하면 지금 그럴 때냐고. 스타벅스 커피도 사치라며 이디야를 먹게 했다.

뭐든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유명해지는 일을 보여달라고. 여자가 경제력이 있어야 멋있게 살 수 있단다. 다른 돈이 되는 계획도 짜보고 못 다루는 맥북으로 일러스트와 포토샵 기능을 사용하여 PPT를 세련되게 만들어 보라고 쪼아댔다.

항공사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35000피트 고도의 하늘에서 기내 구두 뒷굽이 닳도록 걸어 다니며 몸 바쳐 일해도 승객에게 잘하는 건 당연한 거란다. 나의 진심에는 관심 없이 그만저만한 말들을 하고 못 하는 것만 지적했다. 실수한 게 있으면 내가 관찰력이 완벽한 스타일이라 다음 비행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며. 아이 무서워라. 트집을 잡아야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니까 계속 더 잘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격려로 들리지 않으며 끝까지 칭찬은 부정하겠다는 마무리다. 나 안 잘해요?

잘한 걸 칭찬해 주면 춤을 추며 승객들에게는 물론 동료들에게도 간과 쓸개 내주듯 국민 동생처럼 잘할 수 있는데. 나를 기운 빠지게 만드는 가장 싫어했던 Flight Review 시간. 그게 또 비행하는 동안 내 안의 슈퍼맨이 내리는 자기 검열의 실체였다.

더 못 말리는 것은 이놈의 슈퍼맨이 평생 함께할 내 짝이라는 것이었다. 받기에만 급급한 너 같은 남자 정말 지쳐 떠나고 싶다. 나는 슈퍼맨에게 대화를 원했다. 당신이 꼭 원하는 일이 있으면 그녀는 밤낮을 끙끙대며 열심히 하지 않았나요? 잘못해도 나를 이렇게 몰아쳐 갈 수 있을까요? 이 정도면 그만 쉬고 공주 놀이 좀 하면 안 되냐고요. 당신 마인드를 바꾸었으면 좋겠다고. 이러다 내가 당신 곁에 오래 머물 수 있겠냐고요.

나의 슈퍼맨은 가슴에 외치는 메아리가 제대로 들렸는지 어느 순간 다른 남자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걸 먹으러 어디로 갈 건지 아이디어를 짰고, 예쁜 립스틱과 옷을 지나가다 보기만 해도 사주었고, 그동안 여행을 못 갔으니 휴가를 가자고 했다.자신이 하는 일에 꾸준히 작은 변화를 시도하는 걸 보면 그녀를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바로 결과가 안 나와도 커피를 마시러 가자며 영화도 보여주었다.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내 안의 슈퍼맨, 슈퍼맨과 원더우먼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나 슈퍼맨이 사랑하는 사람은 평범한 로이스다.

우리 안의 슈퍼맨은 좋은 동반자로 자신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가? 우왕좌왕 불안했던 한국 정착 초반 3년과는 다르게 우리는 각자의 재능을 살려 대범하게 예술적인 재능을 펼치기로 했다. 그동안 자신을 다급하게 몰아붙여 성공 지향적인 마음에 지쳐가고 있다면 내가 정말 잘하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브레이크 타임을 가져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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