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 미움이다. 난 감정을 그 자체로 받아내지 못한다. 시간을 두고 돌아보며 다듬는다. 마치 글과 같다.
기록을 사랑한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모두 휘발될 것 같은 불안이 있다. 이유 없는 불안은 아닌 것이, 실제로 사진이나 글로 남겨놓은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있으나, 그렇지 않은 기억은 된통 남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낯설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모임을 하며 내가 쓴 글을 종종 남들에게 보여줬다. gpt에게도 보여준다. 종종 듣는 피드백이 감정이 과잉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내가 느낀 감정을 너무 느글거리게 썼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읽히지만은 않나보다.
사람을 덜 사랑하고 기억을 더 사랑한다.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을 사랑하고, 내가 지금 나누는 시간을 사랑하고 싶은데 어렵다. 기억이 되어서야 끄집어 내서 안전하게 곱씹는다. 그때 내가 느꼈을 감정이 무엇인지 돌아본다. 그러고선 글로 연출한다. 글을 쓰면서도 내가 느꼈던 생각과 감정이 맞을지 헷갈린다. 가끔은 기록을 위해 삶을 그린다는 생각도 든다. 잘 연출되고 잘 그려진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 감정마저 그 재료로 소모하고 있다.
솔직한 사람이 부럽다. 어설프고 철 없어도, 미성숙하고 유치해도 자신이 느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 부럽다. 나는 솔직하려고 노력해도 막상 미지의 감정이 들이친 순간에는 내 감정의 정체를 모른다. 여러 이름을 붙였다 떼었다 하며 감정을 보고, 감정의 이유를 찾고, 항상 감정의 이유를 찾는 내 패턴의 근원까지 살핀다. 지겹다. 좀 단순하게 살 순 없을까.
곧잘 잘 사는 것 같다. 감정을 다듬고 살필 줄 아는 능력은 사는데엔 나쁘지 않다. 겉으로 안정되어 보이고, 건강해보이는 듯 하다. 좀 우울하고 가라앉아도 위태로운 기운을 풍기지는 않기 때문일 듯 하다. 대학생 때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상담사가 내게, 날 휘저어 가장 추잡한 밑바닥까지 보고싶은 마음이 든다고 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오히려 ‘더 절대 날 것의 나를 보여주지 않겠어. 너가 과연 내 밑바닥을 볼 수나 있겠어?’ 하는 반항심으로 마음을 닫았다. 하지만 어떤 우쭐감도 주었다. 상담사가 보기에도 나는 (겉으로는) 잘 포장되어 있구나.
나를 소개해보는 글. 이벤트 주제는 내가 제안했다. 이 제안의 근원은 작년의 기억이다. 친한 언니 오빠와 소개팅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소개팅을 주선한다하면 그들을 뭐라고 소개할건지. 각자 “긍정적이고 밝고 솔직한 언니”, “사람을 잘 알고 선을 잘 타는 유머러스한 오빠” 라고 소개할거라고 했다. 과연 그들은 나를 뭐라고 소개할지 물어봤는데 뭔가 그럴듯한 특징은 나오지 않았고, “일단 몇번은 더 만나봐” 라고 소개할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은 첫만남에서 두드러지는 개성은 없을거지만, 만나다보면 어떤 편안함 같은 것을 발견할 것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내가 나를 소개팅 자리에 내보낸다 해도, 뭐라 소개할지 크게 할 말이 없었다. 감정을 잘 정리할 줄 아는 사람 쯤 되려나.
“based on everything you know about me roast me and dont hold back in korean” 을 gpt에 입력하면 아부 없이 아주 날카롭게 나를 설명해준다길래 적어넣었다가, 답변을 읽고 잔뜩 긁혀서 항변해보고자 글을 쓴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어떤지 gpt에 물어보니, 여전히 너는 너 자신을 감상하고 있다고 한다. 자기 해체를 해보려고 글을 썼는데, 자기 해체 글이라 생각하고 보여줬는데, 여전히 안된단다. 어렵다! 내가 지금껏 배워온 삶의 방식은 이런건걸. 무방비할 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