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편지

펜, 편지, 일시정지

by 글희

펜촉이 종이에 닿는다. 일기를 쓰는 중이다. 뭘 쓸지 몰라 생각나는대로 적어내려 간다. 오늘은 어린시절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방금 전에 놀러온 아이가 바이올린 가방을 메고 왔는데, 나도 바이올린을 했었다. 그 아이는 책가방은 앞으로 메고, 뒤로는 바이올린 가방을 메고, 손으로는 보조가방을 들었다. 그러고 씩씩히 나갔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4학년 때부터 2년을 배웠다. 그리고 15년간 바이올린을 킨 적이 없지만 아직도 공연에서 연주했던 곡의 운지법은 손가락이 기억한다. 마지막 현에서 손을 바꿔 잡아가며 시작하는 템포가 빠른 곡이었다. 배운건 2년인데 그 이후로도 6년은 울궈먹으며 떵떵거렸다.

비슷하게 리코더가 있다. 초등학교 때 난 리코더부였다. 합주는 누구든 들어갈 수 있었지만, 중주는 선발되어야 했다. 난 테너 리코더로 중주에 선발되었다. 우리학교 리코더부는 생각보다 알아주는 데였어서 그 속에 속해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게 괜히 으쓱했다. 공연도 하고 대회도 나갔다. 졸업하고 리코더를 손에 만질 일은 없었지만, 야마하 리코더는 한동안 버리지 않았다. 남들은 만져보지 않았을 알토 리코더, 테너 리코더가 내게 있다는 것. 문구점 리코더가 아니라는 것. 소프라노 리코더와는 다른 운지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것. 그것으로도 나는 으쓱했다.

바이올린이고 리코더고 진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난 예체능과는 아무 관련 없는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악기들은 내가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할 줄 안다는 으쓱거림을 종종 안겨주었다. 누군가에게 자랑할 일도 없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가끔 튀어나와 나를 이루는 기억이자 정체성이 되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켤 줄 안다. 나는 알토, 테너를 연주할 줄 안다. 바이올린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천진난만하게 태권도 학원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태권도나 바이올린 또한 저 아이에게도 어떤 원천이 되어주겠지 생각했다.

나는 그림그리기도 좋아했다. 초등학생 땐 무지 연습장에 만화를 그렸다. 유명 아이돌이 빡빡한 스케줄에 시달리다 회사에서 몰래 도망친다. 그러다 누군가와 부딪히고 기절. 깨어나니 그 남자의 집. 남자는 연예계에 무심해 여자가 누군지 몰랐다. 기절한 여자를 어찌해야할 지 몰라 집으로 업어왔고(이미 큰일날 설정), 여자는 자기를 숨겨달라며 동거하는.. 그런 흐름의 스토리로 만화를 그렸다. 그림을 좋아하던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어 좋아하는 만화의 팬아트를 그렸다(코난이다!). 팬카페에 가입하여 그림을 올리고 더 잘그리는 누군가를 보고 잔뜩 부러워하는 댓글을 달았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연인과의 추억을 그림으로 그렸다. 캐리커쳐를 그려주기도 했다. 아이패드가 생긴 뒤로는 종이에 그리던 걸 패드에 옮겨 그렸다. 그렇게 이어져오던 그림그리기는 누군가가 내게 취미를 물었을 때 떳떳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부심이었다.

내 그림그리기는 멈췄다. 일시정지일 줄 알았는데. ‘일시’가 벌써 몇년째다. 무엇을 그려야할지 모르겠을 무렵부터 펜을 잡는 빈도가 줄었다.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없는 일이 명맥을 유지하기란 쉽지가 않나보다.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일은 내 역사 속에 살아있다. 바이올린, 리코더, 만화, 그림그리기 등은 내 속에서 빛나며 나를 지탱한다. 힘은 미약하여 나를 일으키진 못해도, 어디에선가 나를 나답게 세워준다. 일시정지면 일시정지인대로, 정지면 정지인대로 애정하는 나의 역사.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역사. 이 일기 또한 역사가 될거다. 나이 든 나에게 보내는 편지. 지금 내가 관심있는 것들의 기록.

*리코더와 바이올린 사진은 없어서 그림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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