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지는 못하겠다. 그럼에도 살아내는 여름.
여름이다. 충분히 미지근한 집에 장시간 있다가, 아침에 출근한다고 나오면 피부에 선선한 공기가 닿았었다. 집 안 온도와 다른 선선한 감각은 하루 시작의 상징이었는데, 이제는 아침에 나와도 공기가 미지근하다. 하루 시작의 상징이 사라졌다. 본디 우리는 끊김 없이 살아있지만, 감각적인 새로움은 시간의 연속성을 끊어주었는데, 하루가 온종일 똑같다.
어쩌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아직은 눈에 보이는 여름을 살고 있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우거진 녹음, 바람에 흔들리는 청춘, 아지랑이 피어나는 열정, 그리고 젊음. 여름의 상징은 정작 한여름엔 느끼기가 어렵다. 한낮 온도가 38도씩 되는 여름을 살다 보면 여름 햇볕은 열정과 젊음보단 고통과 메마름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 애매한 여름인 지금이 눈에 보이는 여름이다. 여름이 상징하는 생명력이 눈에 보인다.
여리고 연했던 나뭇잎이 꽤나 무르익고 억세졌다. 산유록빛 나뭇잎도 햇빛에 익었는지 녹빛이 진해졌다. 나뭇잎 그림자가 바람에 따라 붙었다가 떨어졌다를 반복한다. 그늘막 아래에서 고개를 들면, 쏴-쏴- 소리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보인다. 낮이 길다. 햇빛이 쨍쨍하다. 사람들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살갗이 보인다. 여름이 청춘이니 젊음이니 열정이니 충분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이유는 살갗에 있을까. 생명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대로 살아낸다.
난 여름이 싫다. 땀이 많은 편인데, 남들은 더위만 견디는 중 나는 땀까지 견뎌야 한다. 닦아내고 닦아내도 흘러나오는 땀은 끈적이고 찝찝하다. 동시에 민망하다. 땀이 나는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에 온 신경을 다 쓴다.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 마음이 궁금하다. 눈에 보이는 여름 말고 보이지 않는 여름도 좋아하는 걸까. 땀은 여름 상징에 들어가지 않을까? 땀 자체는 상징일지 모르겠다. 청춘이나 젊음은 땀과 같이 가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땀으로 얼룩지고 지저분해진 얼굴과 냄새는 어쩐지 여름 상징에서 빠져있다.
보이는 여름 - 우거진 녹음, 청명한 바다, 짧은 옷차림, 노출된 살갗, 쨍쨍한 햇볕, 수박, 얼음 동동 띄운 음료, 컵에 맺힌 물방울. 들리는 여름 - 귀뚜라미 혹은 개구리 우는 소리, 우거진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려 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 매미 우는 소리, 파도 부서지는 소리, 쏟아지는 빗소리. 보이고 들리는 여름을 좋아하는 동안, 소외된 감각과 지워진 여름의 면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햇볕에 살갗이 타들어가는 따가움, 후덥지근하다-로는 부족한 뜨거운 습기, 신발을 뚫고 올라오는 아스팔트 열기, 성가신 모기가 윙-윙-대는 소리, 모기에게 물린 피부의 가려움, 흘러나오는 땀과 말라버린 땀의 끈적임, 땀에 젖은 반팔 면티, 말라버린 반팔티 위 땀자국과 땀냄새, 버스에 앉을 때마다 달라붙었다 쩍쩍 떼어지는 허벅지. 여름 좋아하는 사람은 후자의 감각도 좋아하는 걸까.
다행히 아직은, 눈에 보이는 여름만을 골라 누릴 수 있는 애매한 계절이다. 어제는 한 아주머니께서 포테토칩을 드시며 걷는 걸 보았다. 다리가 드러나는 면 원피스, 바스락대는 여름 벙거지 모자. 한 손엔 포테토칩 봉지를 들고 한 손으론 감자칩을 딱 하나씩만 집어 바자작 와사삭- 씹어 삼킨다. 얇디얇은 감자칩 소리에 사람 먹는 소리가 다 나고, 쨍쨍한 햇볕 아래 걸음과 먹기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눈에 보이는 여름은 저 아주머니에게 다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곧 소외된 여름 상징까지 살아내야만 한다. 난 여름을 싫어하지만, 여름을 좋아하는 이들은 기꺼이 감당해 내겠지. 잊혀지고 지워진 감각, 내세워지기엔 끈덕이는 무거움.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좋은 점만 뽑아 좋아하는 일이 아닐 거다. 가려진 면면들과 수반되는 어려움마저 기꺼이 감내하고, 그럼에도 좋아하는 일이겠지.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는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