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넋이 나갔다. 가사 있는 음악 뿐 아니라 가사 없는 음악마저 소음이었다. ‘마음이 안정되는 피아노곡 3시간 플리’는 마음을 안정시키기보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이들이 오는 쉬는시간 10분만 음악을 틀고, 아이들이 떠나면 다시 음악을 껐다.
내가 해결할 수 없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들어갔다. 내가 상담하던 아이 상태가 악화됐다. 속수무책이었다. 이전부터 이정도로 나빴던 마음 상태를 내가 놓쳤던걸까. 아니면 내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일련의 개입(병원 연계: 심리검사와 약물치료)이 오히려 아이를 악화한걸까. 어찌됐든 내 탓 같았다. 내가 놓쳤든, 내가 잘못했든, 아무튼 내가 부족했다. 아이는 이미 내 능력을 벗어난 곳을 헤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보고할 때 마다 혹시 내가 부족한게 드러날까, 내 책임이 될까, 내가 했던 노력과 개입을 다 말씀드렸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그러다가 ‘이건 선생님께서도 멘탈이 나가시겠는데요’ 한마디에 세상에 교장님 교감님 앞에서 울어버렸다. 세상에! 글을 쓰면서도 창피하다.
봄이 지고, 여름이 도래한다. 아침엔 그래도 선선했었는데, 이젠 출근길 밖을 나서도 미지근하다. 선선함은 어디갔지? 그래도 저녁엔 선선함이 남아있다. 아직은 걸을만한 공기다. 집 앞에 넓은 공터가 있다. 도서관이 들어설 자리인데, 공사에 착공하기까지 시간이 꽤 남아 공원으로 조성되어있다. 알리움, 메리골드, 금계국, 수레국화, 데이지 … 형형색색 꽃들이 다채롭다. 개중에도 향기가 진한 꽃이 있고 향이 거의 없는 꽃이 있다. 가끔 길을 가다 꽃향기를 하나하나 맡곤 하는데 음악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와중에 꽃향기가 느껴질까. 음악은 명백하고 또렷하지만 향기는 은근하고 퍼져버리는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향기가 들어온다. 은근하게 퍼진 향기도 한데에 모여있으면 또렷해지는가. 향기가 코를 통해 몸 속에 들어오니 내 몸 감각이 하나하나 깨어난다. 감각 기관이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 난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내 우울엔 꽃향기가 들어올 공간이 생겼다. 이미 있던 공간인지, 꽃향기가 비집고 만들어낸 공간인지.
‘살아진다’는 어색한 표현이랬다. ‘-지다’는 피동의 표현인데, ‘살다’의 주체는 ‘살음‘을 당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랬다. 글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삶은 살아‘지기’도 하는게 아닐까. 삶의 의욕을 잃고 힘이 빠진 주체가 몸만 살면서 시간을 보낼때, 어디선가 흘러온 꽃향기가 삶으로 끌고 당기는 것처럼. 우울과 죄책감은 살아있는 에너지를 앗아가고 온 몸을 축축 쳐지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살아있다. 내가 맡았던게 금계국의 향이었는지 수레국화 향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내 우울엔 꽃향기가 들어올 공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