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탁한 해가 저문다. 우중충한 여름 공기가 찐득하게 내려앉는다. 땀이 송글송글 맺혀 머리카락을 따라 흐른다. 머리카락은 땀방울 따라 뭉쳤다가 피부에 가닥가닥 달라붙는다. 내게 여름은 이렇다. 가벼워진 옷차림만큼이나 무거워진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고, 아무 데도 향하지 못하여 그만 길을 잃고 만다.
여름의 구름만큼은 좋아한다. 몽글몽글하게 뭉친 구름의 테두리가 또렷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니 웬 비둘기가 여름을 가로질러 활공한다. 금세 전봇대 선 위에 안착한다. 비둘기가 가로지른 경로는, 확실하게 나보다 한참 위여서 ‘날고 있다’는 행위를 비행이 가른 흔적에서 느꼈다. 내가 내 발로 향할 수 있는 공간은 평면인데, 너희들은 3차원의 세계를 활보하는구나. 활보를 넘어, 활공이 가능한 그 날개가 부럽다. 나는 여름 열기에 짓눌려 활보도 뭇 누리고 정지해 있었다.
여름 방학을 두려워하게 된 건 그 때문이었다. 일상에서 ‘할 일’이 도려내진 시간은 처음엔 자유 었으나 이내 공허였다. 우리는 ‘바쁨’으로 일상에서 느낄 실존적인 공허와 무의미를 잊고는 한다. 종일 바쁘고 일정으로 꽉 차있다면, 내 인생이 무의미할리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휴가가 3주가 넘어가면 해야 할 일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은 가시고,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세상은 똑같이 굴러갈 거라는 내 존재의 가벼움만 무겁게 내리 앉는 것이다. 걸음걸음을 옮겨 다니며 재미를 찾아다녔는데 여름의 후덥지근함은 그마저도 가로막는다. 나는 공허를 온통 당해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권투에 등록했다. 몸을 가만히 두고 굴렸다가는 내 몸만 살아지고 내면은 영영 죽을 것 같았다. 찐득하게 날 눌러 당기는 바닥에서 몸을 떼어 일어났다. 어쩌면 우연이다. 하늘을 활공하던 비둘기가 가벼이 전깃줄에 착지했을 때, 나도 몸을 움직이면 자유로워질 거라고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날개로 하늘을 가르는 비둘기처럼 나도. 나도 내 두 팔이 공기를 지름으로써 무언가를 질러내고 뿜어내고 싶었다.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스텝을 밟고 팔을 뻗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가닥끼리 뭉쳐 얼굴에 붙는다. 그 위로 또 땀방울이 흘러내리다 팔을 내지를 때마다 함께 내질러져 튕겨나간다. 나는 여름 속에 살아있다.
관장님께서 권투는 발로 하는 거라 하셨다. 내가 내 무게를 딛고 중심을 잡을 때, 스텝을 밟으며 허리를 돌릴 때, 주먹은 그 힘을 받아 질러지는 거라 하셨다. 손에만 잔뜩 힘을 주어 팔을 내뻗어봤자 발에서 비롯되는 힘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내 두 발을 땅에 잘 내딛고 있는가. 비둘기도 계속 하늘 위에 떠다니진 못하겠지. 어딘가에 착지하여 지상에 발을 디딜 거다. 여름의 우중충한 후덥지근함도 지나가리라. 날 끌어내리는 공기의 무게도 이내 곧 가벼워지겠지. 그럼에도 나는. 여름 속에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