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사랑과 나
측은함이 든다. 그의 삶과 내 삶은 일정 부분 결합하겠지만, 결국 넘을 수 없는 각자만의 영토가 있다. 내가 해 줄 수 없는 영역에서 공허해하는 그를 보면 딱하다. 그가 해답을 찾지 못한 영역은 사랑은 아닌 듯 보인다. 사랑이 그의 전부가 아닌 것을, 나는 탓할 수 없다. 언젠가 그 만의 해답을 찾아 훨훨 날기를 바란다. 그의 삶이 그에게 선물 같기를 원한다.
얼마 전 남자친구는 자취를 시작했다. 비록 발령받은 지역이 멀어 장거리가 됐지만, 공유할 수 있는 일상공간이 생겨 데이트가 안온해졌다.
특히 난 주말 아침 카페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을 애정한다. 집에서 입던 편한 옷 그대로 입고 나가, 그는 책을 읽고 나는 글을 쓴다. 주말 오전 카페에서의 글쓰기는 나의 힐링 루틴이었는데, 누군가와 루틴을 함께하니 빈 줄도 몰랐던 한 꼬집이 채워졌다. 꽉 찬 듯 평안하고 비로소 안녕하다.
어렸을 적 나는 욕심 많은 아이였다. 나보다 몇 개월 먼저 태어난 아이의 뒤집기를 곁눈질로 보곤 그 자리에서 나도 뒤집기를 했다고 했다.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야 했던 10살. 부모님은 내게 비교적 학군지인 A지역과 부모님과 더 가까이 살 수 있지만 시골인 B지역 중 고르라고 하셨고 난 A지역을 골랐다. 초등학생인 나는 외고 과고 자사고를 가고 싶었다. 남들보다 잘 나가는 길을 그 어린 시절부터 걷고 싶었다.
22살. 지금의 남자친구와 연애 3년 차일 무렵, 내 꿈은 평범하게 사는 거였다. 남자친구가 너무나도 좋았는데, 그가 주는 애정은 내가 바라는 무한한 크기에는 부족했다. 나는 그가, 내가 떠나가면 어쩌지 헤어지자 하면 어쩌지 안절부절못하기를 바랐는데, 그는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상대가 날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나보다 먼저 쥐고 평온했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나의 변덕스러운 애정이 아닌 그의 일상 과업이었다. 미치게 부러웠다. 내가 주는 사랑은 기본값으로 깔고 있는 여유가. 내가 주는 사랑만큼을 그가 내게 준다면, 내 삶은 꽉 차고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남자친구와 서로 사랑하며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내 꿈이 되었다.
나의 호승심을 지난 20여 년간 본 어무니는 스물둘의 나를 걱정했다. 내 성질과 다르게 쉽게 현실에 안주하려 했고, 내가 안주하려던 사랑은 어무니의 눈엔 가볍고 사소했다. 그때의 난 어무니께서 세속적이고 눈에 보이는 유형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 느꼈고, 그 시기의 대학생이 그렇듯 어무니의 조언을 콧등으로도 안 들었다.
스물둘의 내가 그토록 바랐던 그의 애정을, 난 이별과 재회를 거쳐 다시 얻었다. 그 사이 난 내가 바라는 것 중 나의 결핍이 만들어낸 허상을 구별해 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바람만으로 타인의 마음을 주무를 수 없단 걸 인정하게 되었고, 애정에 대한 많은 기대를 내려놓게 되었다.
놀랍게도 내가 애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도 애정은 그대로 유지가 되었고, 오히려 더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성장한 만큼 남자친구도 함께 성장했다. 서로의 품에 기대 얻을 수 있는 안온함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 스스로도 알게 되었다고 난 느낀다. 나른한 주말 오후, 그의 가슴팍에 안겨 누우면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당겼다. 어린 시절 내가 ‘사랑’에 집착하느라 놓쳤던 사랑들이 떠오른다. 그가 주는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사랑을 받고도 사랑이 와닿지 않아 불안해 했던 내가 안쓰럽다. 나른한 시간은 공허하지 않다. 스물둘의 내가 바랐던 경지에, 사실은 경지가 아니었던 그곳에, 물 흐르듯 서게 되었다.
어무니께서 내게 조언했듯, 나는 사랑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성정의 인물이 아니었다. 만족할만한 애정을 얻으니 ‘아주 아주 마음에 꽉 찰 만한 일들을 하고 싶다고’ 바라게 되었다. 역시 어무니는 날 참 잘 안다. 나는 사랑만으로 살 수 없다. 내가 그 당시 놓지 못했던 사랑은, 연애 놀이에서 얻는 대접과 나를 향한 욕망이었고, 나를 더욱 원해야 하는 건 상대가 아니라 나였다. 그가 날 더 원하길 바라는 마음은 어무니의 말씀대로 좀 더 얕은 수준의 무언가였다. 사랑은 주말 오후의 느슨함처럼, 평일을 살아가게 하는 보드라운 지지대였다.
내가 가닿을 수 없는 그의 삶에 측은함을 느낀다. 그가 가닿을 수 없는 내 삶에도 측은함을 느낀다. 지금도 그가 사는 자취방에 가는 길이다. 오늘도 그 측은함을 그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대신할 예정이다. 내가 얻고 싶었던 깊은 안정감은 그의 체온을 살갗으로 느끼는 데에서 채울 예정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함께 텐퍼센트 카페에 갈 거다. <오만과 편견> 소설을 쓸 거다. 그는 아마 책을 읽을 테고, 내가 쓴 글을 읽어줄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