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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음 Jul 20. 2024

드라마 작가는 아무나 하나?

어쩌다 수강생


때는 백수로운 오후. 좋은 소식 없나 메일함을 살피던 차였다. 예민한 취준생 심기 거슬리게 메일 제목부터 대놓고 '광고'라고 당당히 밝힌 발신인은 뉘신지? KBS? 평소였으면 잽싸게 1을 없애버리고 닫았을 화면을 3초 스캔했다. 시선을 끈 단어는 '드라마 작가'. KBS방송아카데미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방송 연출부터 카메라 촬영 기법, 유튜브 편집, 드라마 극본 작성 등 다양한 스킬을 기초부터 고급 과정으로 나눠 강의한단다. 물론 유료. 홀린 듯이 웹사이트에 접속해 강의 내용을 찬찬히 확인했다. 수신료는 무료더라도 수강료는 자비 없었다. 주춤.


내게는 나의 언어로 빚은 이야기를 세상에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선보이고 싶다는 고루하고도 오랜 목표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드라마였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공모 당선과 방송 편성을 목표로 몇 년을 문장과 씨름했을 보조 작가와 방송계 잔뼈 굵은 현업 작가들의 노력에 견주면 풋내기의 야심과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시청자의 니즈를 정조준하는 동시에 밥벌이와 자아실현까지 가능한 희대의 명작을 단번에 써내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히트작을 쓰는 게 아닌 한 편의 극본을 완성하는 걸 버킷리스트로 삼았다. 설령 내 원고가 노트북에 쓸쓸히 잠들 데이터로 남을지언정 무덤에 가져갈 이야기 하나는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내 작은 포부다. 그리고 난 드라마 작가하면 참 잘할 것 같다는 지인들의 권위 없는 권유를 몇 번 듣고는 왕초보 특유의 근자감도 조금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귀찮은 웹사이트 회원가입을 마치고 고심에 고심을 거쳐 수강을 하니 마니 하는 게 무의미해졌다. 신청 마감이란다. 그러고 보니 접수 시작 시기도 꽤 지난 시점이었다. 다음 기회를 노려 보란다. 젠장. 다음 기회는 내년이잖아? 그땐 시간도 퇴직금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염병) 그래도 혹시 모를 일말의 가능성을 위해 해당 메일에 살포시 별을 눌러뒀다. 마음만은 분주한 취준 생활에 한여름 낮의 들뜬 기분이 부풀새도 없이 기억 저편으로 저물고 있었다.


하루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생각할 새 없이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기자 생활로 몸에 밴 습관이 있다면 전화가 오면 빠르게 받고 본다는 거였다.


"네(여보세요라고 말하지 않는 습관도 일하며 생겼다)"

"안녕하세요, KBS방송아카데미 담당자인데요. 그때 문의하셨던 반에 한자리 나서 연락드렸어요. 신청하시겠어요?"

"아직 개강 안 했나요?"

"이번주부터에요"


일정 확인. 모레잖아? 갑작스럽게 담당자로부터 받은 연락에 순간 고민했지만 사실 로또 맞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믿고 싶은 운명론. 배우고 싶은 의지와 상황이 맞아떨어진 건 실로 기회였다. 지금, 이때여서 할 수 있는 선택인 셈. 나는 그날로 잽싸게 등록을 마쳤다. 막차탄 쾌감이란.


수업 3주차, 척박한 취준 생활의 동력이 되어준 드라마 작가 수업에서 배운 건 극본을 쓰는 기술뿐만이 아니었다. 강사님은 어떤 이야기를, 왜, 지금 하고 싶은지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수많은 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화자로서 드라마를 쓰고 싶은 이유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끔 만든 것이다. 내가 무엇에 가치를 두는 사람인지 고민이 선행되어야 했다. 단 하나의 이야기를 짓는다면 나는 무얼 화두로 삼을 것인가. 그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여정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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