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랑타령 하고 싶다
결별의 쓴 맛을 제대로 본 올해, 바닥을 친 감정이 다시 반등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너도나도 소개팅을 주선해 줬으며 번호도 따였고 이 밖에도 몇 차례 더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내 서른 줄 인생에 흔치 않게 연애 기회가 차고 넘치는 해였다.
우선 재수 없을 수 있으니 밑밥 먼저 깔면 나는 엄청난 미모의 여성도 아닌 데다 여우 같은 끼쟁이보다 곰 같이 서툰 스타일에 가깝다(근데 이제 돌직구와 애교를 곁들인). 어찌나 해바라기인지 가장 빛나는 나이인 20대 초반에 한 남자를 무려 2년씩이나 짝사랑하며 철옹성 같은 철벽을 쌓은 적도 있다. 그는 내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당당히 모닝콜을 요구한 폭스보이였다. 그는 빈지노 노래 가사처럼 어항의 크기가 수족관 만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랑에 눈멀면 기꺼이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 돌이켜 보면 내 풋사랑이 너무 순수하고 예뻐서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는다. 그 나이 때만 할 수 있는 사랑도 있는 거니까.
지금은 만남 자체에 품이 든다는 걸 알기에 재고 따지는 게 많아졌다. 체력도 없다. 나는 원래 뾰족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 애인 아닌 신랑감 찾냐는 말을 들어왔는데(진짜 신랑감 찾아야 하는 나이가 됨;;;) 이제 바늘구멍 취향이 됐다. 전제는 다음과 같다. 다정할 것, 감각 있을 것, 비흡연자일 것. 별것 없어 보이지만 여기에는 함의된 세부 사항이 있다. 마치 보험사 약관처럼.
1. 다정할 것
1-1. 나만 바라보며 절대 바람피우지 않는다.
1-2. 열받아도 고운 눈을 뜨고 예쁜 말만 한다. 소리치지 않고 뭐든 조곤조곤 대화로 해결한다.
1-3. 다정함을 다른 여자한테 나눠주지 않는다.
2. 감각 있을 것
2-1. 자신에게 어울리는 핏과 배색을 아는 섬세한 패션 센스의 소유자.
2-2. 전시, 영화, 문학 등을 두루 즐기는 문화예술 애호가.
2-3. 향수 취향이 노골적이지 않고 우회적인 사람(시크릿 가든 대사임).
3. 비흡연자
※ 조율 가능하나 흡연자더라도 금연 의지가 있는 사람.
기타 특약
※ 기본값이 텐션 높거나 외향적이지 않았으면 함.
※ 직업의식 있고 책임감 강한 사람이면 좋겠음.
※ 동물을 사랑했으면 좋겠음.
이 정도? 쓰고 보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구체적인 이성관이긴 하다. 뭐든 '좋은 게 좋은 거지'가 아니라 '좋아야 좋은 거다'라는 생각으로 살아왔기에 점점 더 구체적인 이상형이 그려진 듯하다. 이 정도 교집합을 원한다면 혼자 사는 게 맞는 거 같다. 그래도 기왕 정리해 놨으니 앞으로 어떤 사람 좋아하냐고 질문받으면 링크 보내줘야겠다. 그럼 회신 안 올라나..?
근데 이게 사랑에 빠지는 필수 조건은 아니다. 마음이 동하면 뭣이 중하겠는가. 사실 나는 여전히 조건 없이 사랑에 빠지는 순진한 생각을 한다. 짬 내서 만나는 애인 말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도 아깝지 않은 삶의 동반자, 그런 선물 같은 인연이 찾아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번엔 놓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