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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Aug 06. 2023

볼펜을 사시겠습니까?

생을 헤쳐나가는 당신의 의지를 높게 삽니다


너무도 특별한 경험을 해서 살짝 쇼크 상태다.

일요일 낮 지하철, 특급열차라 좌석은 60%정도 찬 상태. 나는 내릴 역을 두 정거장 앞두고 있었다. 통로에 한 아저씨가 서더니 검은 가방에서 볼펜 뭉치를 꺼냈다. "죄송합니다..." 입을 뗀 아저씨가 불우한 처지를 들려주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아서 정확치는 않으나 딸이 어리고, 아내가 아프다고 하셨던가. 승객들에게 4자루 볼펜을 간곡히 사줄것을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아저씨의 볼펜은 그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아 보인다. 물질만능시대에 나 역시도 집에 볼펜이 차고 넘치며, 필기가 점점 필요치 않다보니 평생을 써도 닳지 않을 것만 같다. 아저씨의 볼펜은 너무도 쌌다. 4자루 1000원이라니... 아저씨의 생계에 이 볼펜값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주변을 둘러보니 노약자석에 앉은 스님도 눈을 꾹 감고 있고, 앞좌석에 앉은 아저씨도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볼펜 살 기미는 없어 보였다. 그럴수록 아저씨의 목소리는 점점 서글퍼져갔다. '부탁 좀 드립니다. 하나만 사주세요. 이걸 팔아야 집에 있는 우리 딸이, 아내가...' 모두 귀가 있고, 눈이 있으니 지하철의 달라진 기류를 느끼며 곤란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가방 속에 있던 만 원을 찾아 손에 꾹 쥐었다. 흘긋 아저씨를 넘겨보니 더운 날 땀은 송글송글하고, 그을린 피부, 팔꿈치에는 볼록히 솟은 혹도 보인다. 볼펜을 팔아야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것 같은데, 나로서는 아저씨 혼자의 삶도 이런 거래로는 버거울 것만 같다. "부탁 좀 드립니다. 하나만 사주세요... 하나만..." 아저씨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여기 앉아있는 그 누가 알랴. 지금 중요한 건 의지. 한 사람이 생을 헤쳐나가는 의지에 내가 쥔 이 돈이 작은 힘이 되길 바랐다.


출근길에 나는 항상 노숙자들을 마주친다. 이른 시간 그들은 텐트 속에 들어가 잠에 빠져있다. 갈수록 텐트의 수가 들어가는 것 같고, 언뜻 보면 그안에 짐도 엄청나다. 비와 바람, 햇살을 피하기 위해 텐트는 점점 육중하고 치렁치렁해진다. 낮에는 기둥의 그늘에 앉아 막걸리와 소주를 마신다. 행인들에게 이유없이 고함을 치기도 하고, 대로변에서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보는 노숙자도 봤다. 그들에게 밥벌이할 의지는 아주 조금도 남아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본 그 노숙자들은 구걸도 하지 않는다. 구걸이 쉬운가. 매일 마주쳤던 한 아저씨는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앞으로 내밀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서울역 앞에서 매일 구걸을 했다. 수행자의 고행이 저리 독할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5000원을 드린 적이 있는데 아저씨가 너무도 기뻐해서 놀랐다. (수행자는 아니었어) 지인에게 이 얘길 하자 그런 돈 줘봤자 술 사먹는 데 쓴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노력해서 한 잔 술이 생긴다면 그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내 의지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 마음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지.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사회 문제고.

"부탁 좀 드립니다. 하나만 사주세요... 하나만..."

만 원을 꼭 쥔 나는 이 돈을 어찌 드리면 좋을까?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렸다. 내 행동이 너무 튀어도 곤란하다. 장려할 만한 일은 아니니까. 아저씨가 그냥은 안 받는다며 볼펜 10세트를 준다고 실랑이할 수도 있다. 아저씨가 옆 통로로 넘어가면 따라가 살짝 손에 쥐어드려야지. 아저씨는 강매할 생각도 없어보였다. 그 자리에 서서 검은색 볼펜 뭉치를 손에 쥔 채 읍소할 뿐이었다. 같은 좌석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1000원을 건넸다. 볼펜을 드리는 아저씨. 그 옆에 젊은 아가씨(라기 보다 학생)가 손짓을 한다. 학생이 무슨 말을 하자 "볼펜 드렸는데요."라는 아저씨의 말이 돌아온다. 그 학생은 재차 아저씨를 부르더니 "지하철에서 이런 거 파시면 안돼요."라고 했다. 아저씨는 민망하고, 미안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자리로 왔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아저씨가 옆 통로로 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서있던 자리의 출입문으로 다가서는 아저씨. 나 혼자만의 미션은 이대로 실패인가. 하필 다음역에서 내려서 같이 내리지도 못하는데... 내렸다가 다시 탈까? 너무 오바인가? 아저씨를 쳐다보는 눈길에 옆 학생이 보였다. 태플릿 PC로 수학문제를 풀고 있다. 똑부러지는 성격에 공부를 잘하나보다. 좋은 대학 가고, 좋은 회사에 취업하겠지. 공무원이 될 수도 있고, 국회의원이 될지도 몰라.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나는 '서류 한 장이 부족하네요.'라며 그에게 쫓기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세대차이인가..요?!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읍소하는 사람에게 쉽게 냉정한 말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제 일을 하다니 놀라웠다.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고 사지 못하게 하는 건 품질 문제도 있고, 쾌적한 운행에 큰 도움도 되지 않아서이다. 장려할 만한 일이 아니니 아저씨도 출퇴근 시간을 피해, 일요일 낮의 전철을 택했겠지. 사람이 많지 않아 판매에 큰 도움도 안 될테고, 현금 들고 다니는 사람도 적어지고, 게다가 다들 핸드폰만 보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아저씨의 처지가 딱해보였지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당신은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 수 있는가. 처지가 얼마나 궁핍하고, 얼마나 절실하면 나를 한없이 내려놓고 낯선 타인을 향해 물건을 사달라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걸까.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다, 의지다. 아저씨가 얼른 돈을 모아서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면 좋겠다. 낙담하여 자신도 포기하고, 가정도 포기하여 술에 쩌들어 사는 삶을 택하지 않으면 좋겠다. 한참이나 어린 사람에게 따끔한 말을 들었으니 남은 하루가 얼마가 고될까? 아저씨는 크게 한숨을 쉬며 전철에서 내렸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누군가의 귀인이 되고, 은인이 될 수 있을텐데. 아저씨의 고단한 날에 내가 그런 사람이 될 기회를 놓쳐서 남은 하루가 나 역시 씁쓸하다. 아직 어려서, 경험이 많지 않아 그런 것일뿐 우리 어린 세대가 모두 냉정한 것은 아니겠지..요? 선택할 수 있다면 아저씨의 볼펜을 사준 마음씨를 가진 이들이 많은 사회를 살 수 있길. 아니, 지하철에서 볼펜을 팔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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