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숨바꼭질> 이후 혼자 사는 독거녀로서의 불안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집 초인종 옆에 무슨 표식은 없는지. 혹시 자주 초인종을 누르는 치킨집 배달 아저씨, 택배 아저씨 등이 여자 혼자 사는 집인 걸 알아차릴까 봐 남편 사진을 현관 앞에 가져다 두었다. 오늘도 거실 불을 켜 둔 채로 출근했다.
퇴근길 강남역 사거리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한번 들어가면 빼도 박도 못하고 하염없이 앞차의 후미등만 지켜봐야 하는 그런 골목으로 진입하고 말았다. 몇 센티나 움직였을까, 갑자기 모자 쓴 아저씨가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아가씨가 사람을 쳤다”라고 했다. 비상등을 켜고 내려보니 뒤쪽에 한 남자애가 맨발로 보도블록 쪽에 앉아 아프다며 신음하고 있다.
지나가던 행인인 듯 말하던 그 아저씨는 갑자기 자신을 이 청년의 삼촌이라고 다시 소개해왔다. 갑자기 의구심이 커졌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당장 병원에 함께 가보자”라고 했더니 둘은 그러마 하고 내 차에 올라탔다.
아뿔싸. 차에 태우고 시동을 건 순간, 백미러에 두 남정네의 실루엣이 비치는 것을 보고 그때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모르는 남자 둘을 순순히 차에 태우다니 내가 미쳤지. 용감하거나 아니면 무식한 자신을 탓해봤자 때는 이미 늦었다. 영화 <숨바꼭질>을 볼 땐 왜 저 여자가 겁도 없이 남의 집에 찾아가서 따지는지, 저 여자는 또 왜 애들을 놔두고 나가는지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는데 겪어보니 나는 더했다. 우리 차에 낯선 사람이 타고 있어요. 운전대를 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빨간 신호로 바뀐 틈을 타서 전화기를 열고 회사 단체 채팅창에 “방금 차 사고. 남자 둘을 차에 태워 병원으로 이동 중. 무서움”이라고 보냈다. 나중에 경찰들이 행방불명된 나를 찾는 수사를 할 때 참고라도 되라고.
때마침 나를 기다리던 친구에게서 “왜 아직도 안 오냐”며 전화가 걸려왔다. 사고가 났고 병원으로 이동 중이니 그리로 택시라도 타고 와달라고 이야기하고 끊었다. 나를 데리러 곧 누군가가 온다, 이 상황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뒷좌석 두 남자에게 알린 것이 기뻤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고 보험회사 사고 접수를 하고 나서야 둘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내 차에 부딪혔다는 남자애는 스무 살 정도 되었을까, 그런데 핸드폰도 없고 지갑도 없었다. 신분증은 삼촌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섭다고 떨었던 주제에 남자애에게 눈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혹시 붙잡혀 있는 거라면 눈으로 말해, 도와줄게.’ 그러나 남자애는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내가 꼬인 탓인지 세상 탓인지 영화 탓인지 모르겠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의심이 빚어낸 소동일 수도 있다. 그날 그 사고로 만난 두 사람은 내가 이런 공포에 떨었다는 걸 알면 어이없을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계용묵이 ‘구두’ 신고 다니다 불량배로 오해받고 이렇게 말했듯이 말이다. “살다 보면 별한 데까지 다 신경을 써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소설보다 가까운 것이 드라마이고 영화다. 어쨌거나 복기하자면 나는 사고 난 그 자리에서 경찰에 신고하고 보험회사에 전화하고 기다렸어야 했단다.
갑자기 이름과 얼굴 다 내놓고 혼자 산다는 이야기를 쓰는 것조차 겁대가리 없이 무모한 짓인 건 아닌지 무서워진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러다가 또 무덤덤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귀찮다는 이유로 블랙박스를 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