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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비니 Dec 06. 2019

직급, 호칭, 나이

2019년 12월 6일 어른일기

회사 이야기니 직장 웹툰의 명작 '가우스전자' 짤을 올린다.

내가 지난 4월부터 일하고 있는 현 직장은 올해 추진한 몇몇 조직 혁신 사례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이 많다. 복장 자율화, 근무시간 유연화, 직급 및 호칭 간소화 등이 그 혁신의 예다.

몇몇 것들은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이미 정착돼 있었지만 직급 및 호칭을 간소화하는 작업은 내가 네댓 달 일한 뒤 이뤄졌다. 그 결과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5단계였던 직급 및 호칭은 직급 4단계, 호칭 2단계로 축소됐다. 나는 대리에서 매니저로 호칭이 바뀌었다.

외부에선 이중 매니저, 책임매니저 두 단계로 단출해진 새 호칭에 대해 은근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 같다. 뭐 직급을 아예 없애거나 모든 호칭을 '님'이나 영어식 호칭으로 바꾸는 것보다는 파격적이지 않지만 워낙 보수적 이미지가 강했던 회사가 직급이 잘 유추되지 않고 서열, 연차 구별이 쉽지 않은 새 호칭을 도입하는 것이 새로워 보여서 그런 것 같다.

난 외부인인 양 새 변화를 지켜보기도 하고 어색하게 그 변화의 현장에서 직접 적응하기도 하다가 문득 직급, 호칭과 관련된 한 가지 일화를 떠올렸다.
 
첫 직장이었던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할 때였다. 그날 나는 무슨 일 때문인지 외근 대신 회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기자들은 보통 출입처로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느 상사의 푸념 같은 걸 가까이서 듣게 됐는데, 어느 기업 홍보팀 직원의 전화를 받은 직후였던 그는 "대리가 나한테 전화를 하네"라고 혼잣말 같은 걸 했다. 그러더니 "거기 회사에는 임원이나 상사가 없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가까이 있는 내게 갑자기 동의의 눈빛 같은 걸 요구했다. 난 통화 내용을 잘 몰랐기에 동의도, 동의 아닌 것도 아닌 눈빛과 어색한 미소로 상황을 모면할 수밖에 없었다.


한 부서(취재영역)를 책임지는 데스크로 경력 많은 기자였던 그는 아마도 내게 '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는 자신이 상대할 '급'이 있고, 반대로 자신을 상대해줄 대상의 '급'이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통화는 어느 한 곳의 급이 다른 쪽에 못 미쳐 불쾌 얘기를 하려 듯다. 그 급은 직급, 지위, 연차를 포함해 나이까지 의미할 수 있 것 같다.

통화 내용이 어떤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기 위해 특정 직급의 의사결정권을 필요로 하거나 협상, 의전처럼 지위의 균형이 중요한 경우다면 그의 지적처럼 그 통화는 급이 맞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내가 더욱 겪은 그 상사는 통화 내용, 상대방과의 업무가 무엇이냐는 것과 무관하게 전화를 한 상대의 급 자체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직급을 포함해 호칭, 나이를 두루 신경 쓰는 경우가 많아 보였다. 그런 면에서 그에게 '급이 맞는' 상황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존중(정확히는 대우) 받는 느낌을 받고 만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 사회는 위계질서와 계급, 지위 등을 따지는, 흔히 군대 문화라는 것에 익숙한 편이다. 군인 출신들이 대통령을 몇 번씩 했고 다양한 분야에서 윗분들이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결단력 있는 결정을 해 온 덕분에 고속성장의 기반을 일부 닦을 수 있던 측면도 있다. 그 때문인지 높은 급이 되고 싶다는 사회적 갈망이 크고, 자신의 급(직급, 지위 외에 나이 같은 것까지도!)과 상대방의 급을 따지는 비교 문화가 은연중에 형성돼 있는 편이다. 그 자체로는 문제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꼭 필요한 업무나 일이 아닌 곳에서도 그런 걸 따지려는 사람이 많아 주위 사람들이 피곤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난 최근 회사의 변화가 만족스럽다. 어쩌면 대리가 아니라 직급을 파악하기 어려운 매니저나 책임매니저 또는  '○○○님'의 전화를 받았다면 그 상사는 다른 반응을 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이전에는 직급과 호칭, 연차, 나이를 꽤나 따졌던 것 같다. 업무 담당자가 복수인 경우 차부장님들에게는 어려워 연락하지 않았고 사원님들은 경력이 짧아 해당 업무를 모를 수 있다며 피했다. 그러고는 대리, 과장님 중 한 분을 고르고 골라 연락하곤 했다. 기자였을 때는 권한이 많은 윗 직급보다 말하기 편한 아래 직급 또래 취재원들에게 주로 질문해 얻는 정보가 제한적일 때도 종종 있었다. 같은 '급'을 따지려다 업무 아닌 것들에 괜히 시간을 낭비한 셈이다. 난 요즘 간소화된 호칭 덕분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업무 협조 연락을 여러께 편히 하고 있고, 되레 업무는 수월해진 것 같아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이전보다 급 따질 일 줄어서 특히 만족스러운 요즘이다. / 2019년 12월 6일 어른일기


+ 글 제목은 장강명 소설가의 르포 당선, 합격, 계급을 흉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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