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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tsbie Jul 12. 2021

유아인과 투명사회

스타 유아인이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남동에 위치한 그의 3층 저택은 으리으리함의 표상이었으며, 그 저택에서 처량함을 자처하며 누룽지에 청어 젓갈을 얹어먹는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으레 대저택에 사는 부자들은 파인다이닝을 즐겨먹고 값비싼 샴페인도 곁들어야 하지만 유아인은 시청자들의 암묵적 기대를 부응시키는 모습을 보였고 우리는 그의 소탈함에 열광했다. 방송이 끝난 후 청어젓의 판매량이 증가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것도 없다.


유아인의 이야기에 뒤이어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과거 오랫동안 아이돌을 열렬히 덕질했던 경험이 있다. 누군가의 팬이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싶고 내가 놓친 스케줄이 있다면 괜시리 짜증이 날 정도니 말이다. 3일 내내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콘서트가 열린다면, 무조건 3일을 전부 필참해야 한다. 어제의 ‘오빠’, 오늘의 ‘오빠’, 내일의 ‘오빠’의 모습이 다 다르고,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담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덕질하는 아이돌 팬들에게는 특이한 문화가 있는데 일명 ‘모에화’라고 불리는 캐릭터 부여다. 내 아이돌이 20대 중반의 나이에 세상 물정 다 알아도 팬들에게 있어서는 소년미 넘치는 순수한 모습이어야 하며 무대 위 뿐만 아니라 무대 아래 사생활에서도 이런 캐릭터성을 기대한다. 가령 개인 소통 방송으로 얼핏 비춰지는 멤버의 장난끼 있는 말투 등 말이다. 아이돌들도 이런 팬들의 문화를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본인의 ‘모에화’를 강화시키기 위해 직접 본인들이 짜여진 행동을 취하기도 하는데 이를 ‘비즈니스 퍼포먼스’라고 말하기도 한다.유아인에게서 시청자가 기대하는 바와 내가 아이돌에게 기대했던 바는 일맥상통한다. 그들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면서도 그들이 우리가 예상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길 바란다. 이는 사람들이 대중문화로부터 기대하는 이중성이며 이 전보다 남이 사는 모습을 더 알기 쉬워진 SNS의 사회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속시킨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이 왜곡된 투명사회로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혹자는 ‘신뢰’라고 이야기한다. 투명한 사회를 통해 개인과 개인의 삶이 공개되고 모든 것이 노출된 사회는 서로에 대한 신뢰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바로 ‘안심’이다. 내가 모르는 영역까지 알고 싶어하는 욕구는 너무나도 일차원적이고 원시적이어서 과거 석기시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비바람과 야생 동물의 습격을 두려워하던 그 옛날 선조의 욕구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과거에 인간은 그저 자연을 관망할 수 밖에 없었던 관자(觀)였기에 앎에 대한 욕구는 두려움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우리는 21세기를 살게되면서 견자(見)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견자는 관자와 달리 세상을 본인의 시선으로 구획지을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추려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인스타그램의 ‘하트’와 페이스북의 ‘좋아요’로 은근하게 이 세상을 취향에 맞춰 구성한다.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대로 바라볼 수 있는 21세기의 우리는, 앎에 대한 욕구가 두려움이 아닌 확신으로 마무리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는 투명한 세상을 원하며 알지 못했던 걸 알기를 원한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우리는 미지의 영역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모르는 영역 또한 우리의 취향에 맞게 재단될 수 있는 것이며 미지의 영역이 우리의 기대와 일치함을 확인했을 때 안심한다.

사람들은 유아인이 보여 준 인간미 넘치는 반전 모습에는 호응했지만 동일한 프로그램에서 김사랑이 보여 준 정갈하고 자기관리 철저한 완벽한 모습에는 비난을 던졌다. 우리의 기대치와 달랐던 김사랑의 모습은 꾸며진 것이라고 단정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도 내 아이돌이 유흥을 즐기는 20대 평범한 남성으로 비춰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 기대 속의 아이돌은 순수한 소년미를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신뢰를 쌓기 위해 투명한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대의 충족을 위한 투명사회를 기대한다. ‘시청료’라는 값으로 환산되는 대중문화의 세계를 자본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시청자들은 갑이며 스타들은 을이다. 갑이 을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을에게 걸고 있는 묵시적인 기대감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생활 공개이며, 이는 오늘날 투명사회의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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