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nterberry Dec 16. 2020

누가 이기나 해보자

미국 월세 유목기 (3)


미국 아파트, 알아보고 거주하는 이야기

미국 월세 유목기 (1) 미국 아파트, 탐색부터 거주까지


단지 내 총기 사건으로 인한 이사

미국 월세 유목기 (2) 내 생명은 소중하니까요






아파트 #2.

1년 거주 (최초 계약)

1층. 나무 바닥.



아파트 #1의 게이트는 허술하고 굼떴다. 게이트가 열린 후 차 두세 대는 충분히 통과할 시간 후에 닫혔다(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마저도 거주 2년 차 후반부터는 게이트가 고장 나서 항상 열어두었고 (실질적으로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었다는 말이다.) 고치는 데 두세 달이 걸렸다. 그래서 외부인에 의해 발생한 총기 사건 때문에 이사하게 되었다.


아파트 #2 투어 직후 입주 신청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게이트였다. 거주자resident와 방문객visitor 게이트가 따로 있었고, 높은 벽돌 기둥과 촘촘한 철제 게이트는 "카드키 없으면 아무도 못 들어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게이트 이전에 차단기도 있었고, 차단기는 차 1대가 지나가면 바로 내려왔다. 게이트도 차 2대가 바짝 붙어 부앙~ 밟아야 겨우 지나갈 시간 동안만 열려 있었다. 완공된 지 1년이 갓 지난 새 집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살던 미국 중남부는 한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에 허리케인이 오곤 했다. 어느 날 밤새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패티오 문에서부터 다이닝룸 절반까지 물이 차있었다. (다이닝룸에서 패티오로 나가는 문이 있는 구조.) 누수leaking가 아니라 홍수flooding였다. 반지하도 아닌데요? 걸레와 발수건을 총동원해서 잔디밭을 거쳐온 흙탕물을 닦아냈다. 수습이 끝난 후 패티오 앞길로 나가봤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시공이 잘못됐다. 건축 지식이 1도 없는 내가 봐도 잘못된 부분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의 집(아파트와 주택 공통)은 땅과의 높이차가 없다. 집 안의 거실 바닥 높이와 바깥 잔디밭 높이가 똑같다. 창 바로 앞에서 잔디밭을 보며 밥을 먹으면 마치 잔디밭에서 밥을 먹는 듯한 피크닉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잔디밭과 패티오, 집 내부 바닥의 높이가 평등한 가운데 이 집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았다. (1) 잔디밭의 경사가 패티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2) 잔디밭 한가운데 있는 배수구보다 우리집 패티오가 높이가 더 낮았다. (3) 지붕에서부터 물이 빠져나가도록 설치한 배수관gutter 끝이 패티오 바로 옆으로 나 있었다. 결론적으로 잔디밭 한가운데 배수구로 가야 할 물이 잘못된 시공으로 우리 집 패티오에 모이고 있었다. 우리집이 강남역이었다. 게다가 패티오보다 집 내부가 더 낮아서 수많은 개가 지나가며 볼일을 보는 잔디밭의 흙탕물의 종착지는 우리 집 다이닝룸이었다.


(사진) 왼쪽 위 하얀색 난간 안쪽이 우리집 패티오, 위쪽 창문 안쪽이 다이닝룸이었다. 노란 화살표: 원래 시공되어야 할 내리막 방향 = 물이 빠져나가야 할 방향. 빨간 화살표: 실제로 시공된 내리막 방향 = 물이 흘러가던 방향. 배수구는 장식용. 게다가 패티오 시멘트 바닥이 잔디밭보다 낮았다.



한 달 사이 4번의 홍수가 있었다. 두 번째 홍수부터는 다이닝룸의 천장과 벽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는 누수도 함께 왔다. 매번 아파트 입주자 포털resident portal에 들어가서 유닛 내부로 물이 들어왔다는 글을 남기고 오피스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이 놈의 오피스는 전화를 하면 절대 직원이 직접 받지 않고 음성 메시지를 남겨야 했다.


첫 번째 (홍수): 보고 두세 시간 후에 메인터넌스 직원이 와서 패티오 안팎을 둘러보고 문제점 (3) 배수관 아래쪽 방향을 수정해 준다고 했다. 다음에는 물이 들어오면 치우지 말고 보고하라고 했다. 직접 물 치워주려구요?

두 번째 (홍수+누수): 시킨 대로 물을 안 치우고 보고를 했는데 메인터넌스 직원이 와서 바닥과 벽을 "보기만" 하고 갔다. 물 닦아주려던 거 아니었어요? 다음날 건물 외벽에 방수 페인트를 칠했다. 그 방향 벽이 아닌데요?

세 번째 (홍수+누수): 아무도 안 왔다. 전화도 안 왔다. 그런데 레지던트 포털의 수리 요청maintenance request 상태가 완료complete로 변경되어 있었다. 나만 아무것도 못 본 거야?


분노의 네 번째 홍수는 친정 엄마가 오셨을 때였다. 이른 아침 나와 남편, 아이가 자는 안방 문을 두드리며 얼른 나와보라고 하셨다. 창 밖으로 비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인지 직감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신 엄마가 다이닝룸으로 물이 들어오자 수습하시려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에 수습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나를 깨우신 것이었다. 천장과 벽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패티오에 물이 차올라 발목까지 찰랑찰랑한 사진, 그 너머 잔디밭과 집 안의 다이닝룸의 물 높이가 같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서 오피스 이메일 주소로 보냈다. 포털과 전화로 보고도 했다. 오피스 업무 시간 전이었다.


오피스 앞에서 대기하다가 오픈하자마자 들어갔다. 우리 집을 담당하는 직원은 홍수가 이렇게 심각한 줄 몰랐다고 했다. 몰라서 아무것도 안 했어요? 심각의 정도를 떠나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앞선 세 번의 보고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그 잠깐 사이 뒷방 매니저가 메인터넌스에서 모래 주머니를 패티오 울타리 앞에 갖다 놨다고 했다. 애초에 설계가 잘못됐는데 모래 주머니로 해결한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했다. 게다가 모래 성벽은 패티오 전체 둘레의 3분의 1만 커버했다. 문제의 배수관에는 호스를 연결해서 잔디밭 한가운데 있는 배수구를 향하게 했다. 점잖게 비대면 보고만 할 때는 한 달 동안 외벽 방수 페인트밖에 안 해줬는데, 오피스에 쳐들어가니 20분 만에 모래성을 쌓고 지붕에서 내려오는 물에게 제 갈 길 터줬다. 이러니 열이 받아요 안 받아요? 그리고, 바보야 문제는 시공이야!


아직 계약 기간의 반절도 오지 않았다. 격일로 비가 쏟아지는 동네에서 비가 올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 수는 없었다. 계약서를 뒤져 관련 조항을 찾았다. 대학원 동기들(미국인들)과 주변 언니들(미국 거주 기간 평균 10년 전후)에게 상황을 알리고 대응법을 물어봤다. 그동안 수리 요청한 기록을 모으고 오피스의 대응을 정리해서 위약금 면제, 보증금 전액 반환, 이사 비용 청구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해보라고 했다. 출근했던 남편이 조퇴까지 하고 전쟁을 하러 갔다.


담당자는 거듭 사과하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 외주 수리 업체contractor를 바꿔서 반드시 완벽하게 수리할 것이다.

•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다면 붙잡을 수는 없지만 단지 내에서 다른 유닛으로 트랜스퍼하는 방법도 있다. (트랜스퍼 비용이 $500이라고 말해서 나를 더 열받게 했다. "너네가 제때 수리 안 해줘서 트랜스퍼 하는데 돈까지 받는다고?" 라고 불을 뿜었더니 면제 방법을 찾아본다고 했다.)

•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든 (이사/트랜스퍼)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은 다른 사람에게 렌트를 하기 위해 다 고쳐야만 한다.


그동안의 대응을 보면 완전히 고치겠다는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우리로서도 수리가 잘 되어 이사를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시급하게 수리를 한다고 했으니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며칠에 걸쳐 지붕을 뜯어내고 우리 집은 1층인데 왜 2층의 지붕을 뜯는지? 뚝딱뚝딱 하고 있었다. 그 다음주 내내 비 예보가 있어서 제대로 고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일주일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 사이 홍수도 누수도 없었다. 이사도 트랜스퍼도 없었던 일이 되었다.


일주일쯤 지나 오피스 직원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지붕을 뜯어서 누수 지점을 찾아서 고쳤으며, 유닛 내부 천장과 벽에 남은 누수 자국을 없애고 페인트를 칠하는 외주 직원contractor을 보낸다고 했다. 그렇게 온 페인터 아저씨는, 본인이 꼭 1년 전 이 집에 와서 같은 작업을 했단다. 이 아파트는 저렴한(=쓰면 안 되는) 자재를 써서 겨울을 날 때마다 파이프가 터질 수밖에 없고 현재 누수가 없는 집들도 문제가 생기는 건 시간 문제라고 했다. 남편은 1년 계약이 끝나면 바로 나가자고 했다.


시작하면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아파트를 지은 지 1년이 갓 지난 시점에 이사를 들어갔다. 다시 말하면 전 세입자는 최초 계약 1년만 살고 나간 것이었다. 어떤 이유로 나갔는지 모르지만, 누수와 홍수, 제때 제대로 조치하지 않는 오피스의 태도에 지쳐 신축 아파트에서 1년 만에 나갔을 수 있겠다 추론해봤다.


이렇게 홍수 역사가 끝이 났다면 좋았겠지만... 4번째 홍수와 오피스 전쟁 이후 배수관과 배수구를 연결한 호스를 볼썽사납게 잔디밭 위에 놔둔 상태였다. 나는 그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어차피 우리집에서는 잘 안 보였고, 잔디밭이 깔끔한 것보다 우리집에 물이 안 들어오는 게 훨씬 중요했다.) 우리 윗집에 사는 깔끔한 할머니는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시커먼 호스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 할머니는 본인에게 호스가 잘 보이지 않도록 호스 위치를 조정했다. 건물에 밀착시킨 호스의 끝은 우리집 패티오를 향했다.


왼쪽 위가 우리 집 패티오와 그 앞 모래성, 오른쪽 아래 검은 동그라미가 배수구. 잔디밭 한가운데 호스의 족적.


거주 규정 상 아파트에서 설치한 설치물은 입주자가 손댈 수 없었다. 그러니까 윗집 할머니는 규정도 어긴 것! 윗집 할머니는 호스를 치우고 우리는 "규정을 지키기 위해" 메인터넌스를 불러 원상복구하는 싸움을 서너 번 반복했다. 홍수가 나지 않던 기간에도 나는 이 할머니 때문에 오피스에 계속 진상을 부렸다. 할머니는 우리의 신고를 받고 호스를 배수구 쪽으로 옮기던 메인터넌스 직원과 악다구니를 한 후 다시는 호스를 만지지 않았다. 오피스는 우리에게 호스를 곧 매립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잊은 것 같았다. 호스는 세 달 동안 잔디밭 한가운데 방치되었다.


세 달 만에 5번째 홍수가 났다. 배수관 끝에 연결한 호스가 직선으로 땅 속으로 들어가야 연결 부위에서 물이 덜 새는데, 매립을 안 했으니 이 부위가 땅에 닿으며 직각에 가깝게 꺾여 거기서 물이 상당량 새고 있었다. 그 물은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 (2) 잔디밭이 패티오보다 높은 이유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패티오에 모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포털과 전화로 보고를 했다. 아무도 오지 않은 채로 포털의 수리 요청 상태가 완료로 변경되었다. 이 오피스는 노답이다. 호소 창구를 바꿔야 했다. 아파트를 관리하는 부동산 회사property company를 검색하고 이메일 주소를 저장했다. 미국 중남부 여러 주에서 수백 단지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꽤 큰 회사였다. 총 5번의 홍수에 대한 나와 오피스의 대응을 적어나갔다. 거듭되는 홍수로 만 1세 아이가 물에 미끄러져 넘어져 외상을 입거나 습기로 인한 만성적인 호흡기 질환을 앓을까 두렵다고 덧붙였다. 가장 친했던 대학원 동기(미국인)에게 연락해서 다음날 만났다. 그동안의 홍수 역사와 오피스/메인터넌스의 대응을 읊은 후 본사에 컴플레인을 넣을 생각이니 컴플레인 레터를 봐달라고 했다. 친구는 흥분한 나의 문체를 침착한 톤으로 다듬고 구체적인 보상 액수를 제시하는 문장을 추가해 주었다.


5번째 홍수가 난 다음날 밤 12시, 미국인의 첨삭을 받은 컴플레인 레터를 본사에 보냈다. 그 다음날 날이 밝기도 전부터 바깥이 시끄러웠다. 호스를 매립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이렇게 빠른 일처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오피스에서 이메일이 도착했다. 형식적인 사과의 메시지와 함께 다음 달 월세를 $200 깎아주겠다고 했다. 겨우 $200이냐고 생각했지만 (레터에 제시한 최소 금액이었다.) 더 이상 에너지를 쓰며 그들과 언쟁하고 싶지 않았다.


이후 퇴거할 때까지 홍수도 누수도 없었다. 장장 4개월의 홍수와의 전쟁실질적으로는 오피스/메인터넌스와의 전쟁은 월세 $200 감면이라는 사이다 한 모금으로 끝이 났다.


겉으로 이렇게 멀쩡해 보이지만 어딘가에 물이 새고 있을지도 몰라!



라고 착각했다. 오피스 그들은 빅픽처가 있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세입자는 언제나 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