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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살이-스물여덟달차(23.12월)

경축 - 한국-인도 수교 50주년

by 소전 India Apr 01. 2025

지난 12월 10일 안살플라자(ansal plaza)에서 한-인도 수교 50주년 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한국과 인도 관계에서 역사의 한 장면을 함께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안살플라자는 1999년에 세워진 인도 최초의 현대식 복합 매장입니다. 16,500m2의 면적에 반원 형태의 두 건물이 있고 가운데에는 광장이 있습니다. 제가 2007년에 한-인도 CEPA 협상 대표단으로 인도에 출장을 왔을 때 방문해서 쇼핑했던 기억이 납니다. 15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건물도 오래되었고, 코로나를 겪으면서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한-인도 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사실 안살플라자에 한국 식당이 하나 있고, 동료들과 반주를 곁들어 저녁 식사를 하고 광장을 지나올 때 허영청 밝은 달을 보고 고국을 생각하며 생음악을 부르던 기억도 있습니다. 50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않은 시간입니다. 한 사람으로 보면 반평생이고 세대로는 2세대 이상의 긴 역사입니다. 공자님은 50년 인생의 시간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하여 하늘의 뜻을 알아 그에 순응하거나 하늘이 부여한 최선의 원리를 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문화원에서 준비한 공연을 보면서 50년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지나온 50년의 역사를 찾아보았습니다. 인도살이가 2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지만, 경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50년의 역사를 대표할만한 사람들과 사건들 중에서 열 가지를 골라보았습니다. 


1. 허왕후, 50년의 역사를 2천년으로 만든 분

본명이 허황옥(許黃玉, 32년 ~ 189년)이고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후로 허황후 또는 보주태후라고 합니다. 힌디어로는 슈리라트나(सुरीरतन), 타밀어로는 심바발람சீம்பவலம்)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아요디아의 공주로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와서 왕후가 되었다.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허왕후의 역사가 사실인지, 설화인지, 인도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여러 설들이 존재합니다. 역사적 논쟁은 뒤로 하고 2천년 전에도 인도와 한국이 왕래를 하면서 사돈국가를 지낼 정도의 기까운 나라라는 것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지금도 인도 아유디야 시와 한국의 김해시가 인연을 이어 지속적인 교류를 하고 있고, 두 지역에 허왕후를 기리는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인도 수교 50주년의 역사를 2천년으로 확대한 귀중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허황후 영정사진(출처 : 나무위키)허황후 영정사진(출처 : 나무위키)

 

2. 왕오천국국전- 혜초 - 최초의 인도 여행자

혜초(慧超, 惠超, 704년~787년)는 신라 성덕왕(또는 경덕왕) 때의 고승으로 주로 중국에서 활동을 하면서 인도를 여행하면서 최초로 여행기를 기록하였습니다. 기행문 제목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천축국은 당시 중국이 인도를 부르는 말로 인도를 동,서,남,북, 중천국으로 구분함)입니다.  이 책은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가 중국 돈황의 천불동에서 여러 고서와 함께 발견하였습니다. 원래 3권이었듯 하나 당시 앞 뒤 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일부가 발견되었고 1915년 일본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기행문 내용에 계림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시를 보고 혜초가 신라의 고승인것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국명과 지명, 전체적인 일정 등을 알기 힘들지만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사회상과 풍습이 나온 유일한 책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행문 원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서 대한민국의 국보로는 지정되지 않은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 4년 동안 불심 하나를 안고 2만여 km의 생명을 담보로 여행했고,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가 인도를 방문하고 교류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여행도 (출처 : 매일신문)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여행도 (출처 : 매일신문)


3. 인도 제60공정 야전 병원 부대

인도가 6.25 한국전쟁에 도움을 준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인도는 6.25 전쟁에 발발하자 인도의 60공정 야전병원은 1950년 11월 8일 모두 346명의 인원으로 배를 통해 부산으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인도는 중립국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이 한국 땅을 점령한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해 유엔의 요청에 따라 의무 부대 파병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60공정 야전병원 부대는 1954년 철수할 때까지 연간 627명의 인력이 투입돼 군인·민간인을 포함하여 입원 환자 2만 명과 외래 환자 22만여 명을 돌봤고, 2천여 회가 넘는 수술도 했다고 합니다. 진료뿐만 아니라 한국 학생들에게 의학을 가르치거나 한국 의료진과 협진하기도 하였습니다. 부대원들이 쓴 붉은색 베레모 때문에 ‘붉은 천사’로 불렸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의무부대원은 아니지만 6‧25전쟁 당시 UN의 인도 대표로 왔던 나야 대령(Col. Unni Nayar)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1950년 8월 12일 경북 칠곡군 왜관 근처에서 지뢰 폭발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나야 대령의 시신은 다음날 대구 수성구 범어동에서 화장되었고 성금을 모아 故 나야 대령비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역사는 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사관에서는 이분들의 헌신과 봉사를 잊지 않고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사관에서는 아그라에 있는 60야전병원을 방문하고, 당시 한국에 파견되었던 가족들을 초청하여 뜻을 기리고 위로하는 행사를 계속 개최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향하는 인도 60공정 야전병원 부대원들(출처: 연합뉴스)한국으로 향하는 인도 60공정 야전병원 부대원들(출처: 연합뉴스)


4. 지기철 초대 한인회장님

인도에 처음으로 이주한 교민은 누가였을까? 자료를 찾다보니 조금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바로 반공포로였습니다. 앞서 인도가 의료지원 부대도 파견했지만, 1953년 6월 타결된 정전협정에서 ‘중립국 송환위원회’ 의장국을 맡았습니다. 당시 북한 송환을 거부하고 중립국행을 택했던 북한군 출신 반공포로 7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북한 체제에 대한 염증과 남한에서 '빨갱이'로 취급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제3국을 택했다고 합니다. 실제 목적지는 멕시코였으나 송환 승인이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인도를 경유지로 하여 1954년에 인도 첸나이 항에 임시로 도착했습니다. 2년이 지나도록 멕시코에서 연락이 없었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부터 입국 허가를 받아 50명은 브라질로, 11명은 아르헨티나로 떠났고, 15명은 인도에 남았다고 합니다.  이중에 한 분이 바로 지기철 초대 한인회장님입니다. 그중에 한 분이 바로 지기철 선생님입니다. 지 회장님은 1923년 경북예천에서 출생, 가족들이 1926년 만주 심양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20세가 되던 해에 일본 관동군, 중국 인민해방군을 거쳐 조선인민군이 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인민군 소좌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미군에 투항하였다고 합니다. 인도에 도착하여 인도 정부와 교민들의 지원으로 양계장 운영을 시작으로 인도에 개척자 정신으로 인모수출, 모래사업 등을 통하여 기업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1962년 인도에 총영사가 설립되면서 한국 국적과 여권을 취득하였고 결혼하였고 1968년에 초대 한인회장으로 취임하여 대략 15년에 걸쳐 한인회를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아쉽게도 1998년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역사의 격동기에서 전쟁의 참상 속에서 고국을 등진 아픔을 극복하고 머나먼 인도에서 한인회를 만드시고 활동기반을 만들어 주신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5. 방희 뉴델리 초대 영사(1962)와 박찬현 초대 대사님(1974)

인도는 남북간 동시수교국으로 대한민국과는 1962년 3월 영사관계를 수립한 이후 1973년 12월 10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1962년 영사관계 수립을 거쳐 1973년 12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초대 인도 델리 총영사관은 방희(方熙 1922~2022) 총영사가 처음으로 인도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습니다. 방 총영사님은 인천 중학교와 제물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예편후 1962년 3월 7일 주영 공사로서 인도 뉴델리 초대 총영사직을 겸임했습니다. 그 이후로 동남아친선문화사절단 부단장으로 동남아 5개국을 순방하면서 그들 국가와의 인사교류, 문화협정 체결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고 합니다. 


초대 대사로 근무하신 박찬현 전 대사님은 1917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출생, 부산제2공립상업학교,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미국 미주리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시 정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정치가로서 활동을 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일보, 경향신문 사장을 지냈습니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주 터키 대사를 역임하시다 1974년 2월, 초대 인도대사로 부임을 하셨습니다. 이후 1977년에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장관을 역임하셨고, 1990년 7월 세종대학교 재단이사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재임 중이던 1991년 9월 급성 뇌출혈로 별세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서 이분들의 업적은 나와있지 않아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수교 50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 정부와 협력업무가 쉽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외교관계를 정립하고 업무를 수행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인도대사관이 존재하고 인도와 협력관계의 출발점을 두신 방희 총영사님과 박찬현 초대 대사님의 업적에 감사를 드립니다. 


6. 한국대사관 건물과 건축가 김수근 선생님

제가 처음 주인도 대한민국 대사관을 방문한 것은 2007년 8월 이었습니다. 육중한 대문을 지나 붉은 벽돌이 인상적이었고, 한국의 멋이 어우러진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21년도에 주재관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늘 대사관 건물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특히 석양이 질 때면 석양이 주는 색감과 대조되는 색으로 정말 보기가 좋습니다. 인도 대사관 건물은 4,800여평의 대지에 본관, 별관, 관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역사를 알아보니 1976년부터 1908년부터 인도대사를 역임하셨던 이범석 전 외교부장관님의 노력과 집념으로 탄생했습니다. 대사 역임시 인도의 네루 정부는 뉴델리를 세계 외교 중심지로 만들고자 수도 한쪽에 비어 있던 큰 땅을 외교단지로 개발했다고 합니다. 외교공관을 짓는 국가에는 영구임대 형식으로 땅을 사실상 무상 제공하면서 1만 6000여㎡가 넘는 땅을 대여(매년 임차료 5루피) 받아 대사관과 관저를 지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범석 인도 대사님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펜으로 쓴 편지와 육성 녹음을 보내 호소하였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님도 자필 편지로 홍콩 수출입은행 한국지점에 가서 돈을 빌려 지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건물의 설계와 건축은 그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김수근 선생님에게 의뢰하였다고 합니다. 김수근 선생님은 3개월 동안 인도를 여행한 후에 고대 무굴 제국의 수도 아그라의 고성 레드 포트의 이미지를 살려 설계를 하였고 1978년 5월에 대사관 건물과 관저가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인도에 우리나라 정부를 대표하여 인도의 열정과 한국의 미를 느끼게 해주는 대사관을 중심으로 한-인도 더 협력하고 교민과 기업들을 지원하는 든든한 성의 역할을 기원합니다. (출처 : 18.3.19. 신봉길 전 대사님이 서울신문 기고 내용 인용([해외에서 온 편지] 인도 아름다움 품은 한국공관, 이범석 前대사의 선견지명).

대한민국 대사관 전경(출처 : 대사관 홈페이지)대한민국 대사관 전경(출처 : 대사관 홈페이지)


7. 한-인도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CEPA ;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


우리나라가 인도와 맺은 협정은 1974년 무역 촉진 및 경제기술협력에 관한 협정, 1976년 과학기술 협력에 관한 협정, 1985년 이중과세 방지협약, 1996년 상호투자 촉진, 보호 협정 등이 있습니다. 2010년 한-인도 CEPA를 통하여 포괄적 경제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습니다. 모두 다 중요한 협정이지만 특히 한-인도 CEPA는 인도의 높은 관세를 인하하여 무역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나라는 거대 국가와 맺은 첫 자유무역협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인도 CEPA 발효이후 교역량이 2010년 171억 달러에서 2022년 278억 달러로 60% 이상 급증했습니다. 우리나라와 인도의 경제 규모나 잠재력을 감안한다면 조금 부족한 측면도 있지만 꾸준한 개선 협상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8. 류시화 - 인도의 생생한 정서를 전달한 시인

지구별 여행자라는 시집,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이라는 에세이를 발간하여 인도를 널리 알린 시인입니다. 1958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안재찬입니다. '류시화'라는 이름은 안재찬이 작품상에서 쓰는 필명으로 같은 학교 선배의 본명을 허락 받고 빌려 쓴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류시화 시인의 책을 읽고 인도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실제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에세이가 비현실적으로 인도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왜곡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류시화 시인은 개정판에서 “사람들은 나더러 왜 인도를 아름답게만 묘사하느냐고 묻는다. '그런 인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 그런 아름다운 인도는 내가 경험한 세계이며, 내 눈으로 본 세상이다. 물론 추한 인도, 위험한 인도, 슬픈 인도도 보았다. 사기꾼과 강도와 부패한 관리들도 보았다.” 고 합니다. 아는 만큼 생각한 만큼 보이는 것처럼 각자 삶의 가치와 깊이에 따라 보이는 인도의 풍경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일 것 같습니다. 꾸준히 성장하고 짧지만 심금을 울리는 문구와 표현을 보고 있으면, 인도에 사는 저도 범접하기 어려운 몇 차원 높은 경지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류시화 시인의 관점으로 풀어주는 인도 이야기가 계속하여 출간되기를 바래봅니다.

류시화 시인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에세이 (출처 :교보문고)류시화 시인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에세이 (출처 :교보문고)


9. 한국에서 유명한 인도인 - 럭키

1978년 뉴델리에서 태어났고 델리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을 수료한 인도 사람으로 본명은 아비쉐크 굽타(Abhishek Gupta)입니다. 1996년부터 방송인,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본명보다는 럭키라는 예명으로 많은 방송에 출연하였고, 한국에서 인도라는 나라를 알리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도에 사는 제가 럭키 방송을 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도 많습니다. 비정상 회담에서 인도 이야기를 인도 사람으로 직접 듣는 묘미도 재미있습니다. 럭키를 보고 있으면 인도 사람들의 활달함과 쾌활함 그리고 시원시원한 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언어, 종교, 신분제도 등 우리가 인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보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인도 나름 고유한 문화와 전통으로 기인한 것도 많다고 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름을 얼마나 이해하는 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인도에 한국 드라마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아직 TV방송에 우리나라 사람이 방송에 나오는 것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럭키가 우리나라 방송국에서 인도라는 주제로 방송하듯이, 우리나라 사람들도 인도 방송국에서 한국을 소개하고 알리는 장면이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10. 또 하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사람들 - 인도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

인도에는 약 530여개의 우리나라 업체가 진출해 있습니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이 90년대 후반으로 대략 25년 이상의 경력과 인도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거친 황무지에 공장 건물을 짓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물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을 통하여 또 하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인도 수교 50주년은 서류상 존재하는 기념일이라고 한다면, 기업들이 인도에 진출하여 성장하고 성공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들의 우수한 제품으로 우리나라의 수준을 알게 해주고 우리나라의 명성과 자긍심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인도에 대한 기사나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늘 낙관론과 비관론, 긍정적 의견과 부정적 의견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양비론은 모든 기업들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고, 직간접적인 경험의 결과이기 때문에 진행형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에 기여한 인도에 진출한 기업들을 응원하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인도진출 우리나라 기업현황(출처 : 코트라 뉴델리무역관)인도진출 우리나라 기업현황(출처 : 코트라 뉴델리무역관)

 이번 달은 한-인도 수교 50주년 기념행사 아이디어를 가지고 한달살이를 썼는데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50년 역사를 한달살이에 채운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ㅠ.ㅠ). 마지막 날까지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선정한 인물이나 주제의 범위도 컸지만, 사람마다 수많은 역사와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생생한 역사의 순간들이 잘 기록되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허황후, 혜초 스님, 지기철 회장님 등 역사 속의 인물이나 인도 진출 기업 등 현존하는 모두의 공통점을 바로 도전과 탐험정신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50년의 역사를 쌓아올 수 있었습니다. 50년이 지나는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다시 50년의 역사를 써나가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2023년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한해 동안 인도 한달살이를 사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2023년 12월 인도에서 소전(素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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