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우먼의 비애란 이런걸까
영화 '슈퍼맨'에서는 거대한 악의 세력에 의해 시민들이 위험에 빠지면 갑자기 파란 유니폼을 입고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나는 슈퍼맨이 있다. 천하무적 무엇이든 척척 해결하고 싸워서 이기는 슈퍼맨은 시민들을 구하고 담담한 미소를 보내며 홀연히 사라진다. 그럴 때 느끼는 슈퍼맨의 감정은 어떨까?
그는 우선 대중들을 구해냈다는 자부심과 영웅심리에 힘이 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허구헌날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해야하는 자기 인생이 지독하게 힘들다는 생각에 씁쓸하진 않을까?
"여보~~!!"
내가 방에 있는 남편을 부르는 경우는 밥먹을 때, 형광등 나갔을 때, 그리고 벌레가 나타났을 때다. 연휴 마지막날이었던 어제는 아침부터 난데없이 개미떼가 출현해서 온 가족이 한바탕 개미소동을 벌였다. 가장 먼저 개미떼를 발견한 난 눈이 띄는 종이 상자를 집어들고 흡사 전쟁을 치르는 무사처럼, 인간 살충기가 되어 개미들을 무찔렀다.
"여보~~! 개미가 3-40마리나 있어!!" 자고있던 남편은 놀라서 나와 사건현장을 살펴봤다. 발원지가 첫째의 방 한쪽 벽면과 마루바닥의 틈새임을 확인하고 서랍장을 빼내어 남은 개미들을 모두 박멸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하루종일 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감시하며 보낸 하루였다.
첫째는 벌레를 두고보지 못하고 유난을 떠는 극혐좌(엄마 닮음), 둘째는 벌레를 신기해하고 반가워하는 파브르좌이다. 나는 원래 벌레를 보면 극혐하는 성향이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침착함을 유지하는 몰래극혐좌. 마지막으로 남편은 우리집 공식 벌레킬러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아침 사건현장을 처음 목격한 나는 다급한 나머지 불행히도 직접 개미들을 처치해야 했다. 역시 엄마란 극한직업이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문제의 서랍장 위 안보는 책들과 잡동사니들을 몽땅 정리하기로 했다. 대부분 책들은 버리고 일부 당근에 올려 당일 거래까지 완료. 하는김에 가볍게나마 대청소까지 했으니 개미가 불러온 효과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연휴기간 이틀동안 비가 내리다 그치고 나니 후텁지근한 동남아 날씨처럼 변해버렸다. 올해는 요금인상 이슈로 떠들썩하던 전기세가 무서워서 에어컨 틀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더운건 참아도 습한 건 도저히 못참겠다.
그래서 오늘 아침엔 에어컨 청소를 감행하기로 했다. 구형 모델인 우리 에어컨은 아래 양쪽의 기다란 판을 떼어내면 안쪽에 그물처럼 생긴 필터를 빼내서 물청소를 할 수 있게 돼 있다. 판에 끼워진 그물필터를 확인하니, 이건 뭐 그물이 아니라 그냥 회색 먼지필터가 돼 있었다. 구멍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두꺼운 먼지로 뒤덮인 것이다. 몇번을 칫솔로 쓸어내서 대량의 먼지를 제거하고 창가에 두어 건조시키기로 했다.
역시, 엄마란 극한직업이구나.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에어컨 실외기가 있는 세탁실은 작년 가을 세탁기와 건조기를 병렬로 설치하면서 꽉 차버려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는 지경이 됐다. 실외기를 가동시키려면 갤러리 창을 열어줘야 하는데 손잡이까지 닿지를 않는 상황이었다. 작년 가을 '여름되면 어쩌나'했는데,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남편이 옷걸이를 분해해서 기다란 쇠막대기 처럼 만들어왔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희망을 가졌는데, 멀리서 쇠막대기로 손잡이에 걸어서 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손잡이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서 아래로 내려야 빗살로 된 창문이 열리는 거였다. 결국 사람이 들어가서 해야한다는 건데, 최후의 수단으로 둘째 아이를 출동시켜야 하나 고민이 됐다.
내가 들어가려고 해도 머리가 통과를 못하는 상황이어서 고민하다가 건조기와 벽면 사이에 머리를 끼워봤다. 순간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노파심이 들었다. 어릴 때 보았던 '위기탈출 넘버원'처럼 119를 부르게 되면 어쩌나, 주인공이 머리가 돌아가는 '죽어야 사는 여자'처럼 되면 어쩌지 하는 그로태스크한 상상을 잠시 했다.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아래위로 설치된 상태인데 건조기는 세탁기보다 깊이가 깊다. 즉, 앞으로 더 나와있었던 것이다. 그럼 세탁기를 통과하면 나갈 수 있겠다 싶어, 자세를 낮춰 앉아서 나가봤다. 그랬더니 웬걸,통과가 되는 거다.
"여보~~ 나 나왔어!!" 상기된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근데 사고날지 모르니 이쪽으로 와서 살펴봐!" 그렇게 나는 갤러리 창을 열고 다시 앉은 자세로 세탁기와 벽을 통과해 빠져나왔다.
"휴- 살았네"
옆에서 열심히 핸드폰으로 ‘갤러리창 손 안대고 여는 법’을 검색하던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런 게 바로 모성애라구!" 약간의 허세를 더해 내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갈 준비를 하느라 씻는데, 거울을 바라보다 문득 내 모습이 참, 짠했다. 사는게 이리 힘든건가 괜히 푸념도 들었다. 내 안에는 엄마,아내,딸,사회인, 순순하 나 등 여러가지 페르소나가 존재하는데, 오늘처럼 엄마의 역할을 위해 용을 쓰는 날이면 가끔 순수한 내가 엄마인 나를 처량하게 바라본다.
어젠 인간 살충기가 되어 개미들을 무찌르고, 오늘은 흡사 에어컨 정비공이 되어 일했다. 이런 고귀한 노동을 누가 알아주겠냐만은...
나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슈퍼우먼'급이다.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안쓰럽다.
다행히, 오늘은 '엄마'라는 페르소나가 '나'보다는 조금 더 강했던지, 힘겨웠지만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속이 후련해졌다. 덕분에 오전 외출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섰다.샤방샤방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