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Disabled 01화

워킹맘 10년, 2년의 고민과 1년의 육아휴직

Disabled 01

by 소안키친

2020년 1월, 나는 15년간 다녔던 직장에서 처음 1년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입사 후 두 번의 출산휴가와 한번의 육아휴직, 결혼 휴가 등을 쓴 적이 있었지만, 최장 6개월이었다.

보통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돌 때까지의 애착관계를 생각해서 육아휴직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약 10년전까지만 해도 직장에서 1년씩 육아휴직을 쓰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다닌 회사 또한 중견 규모임에도 출산휴가(3개월)를 제외한 육아휴직 카드를 내민 직원들은 눈치를 봐야 하는 분위기였다.


또 당시 나에게는 너무도 혜자로운 시터이모님이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기에 아이들을 오랫동안 마음 편히 맡기며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꿋꿋하게 유지해온 직장생활을 놓게 된 건, 육아문제가 가장 큰 이유였다. 첫째 아이 초등 입학을 앞두고 아이들을 키워주신 이모님과 작별을 하게 됐고, 새로운 분을 모시게 됐다. 새로운 이모님은 스타일은 많이 달랐지만, 큰 문제는 없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어도 그냥 넘겼다.


단지 남자아이 둘이고, 첫째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버릇없이 굴 적도 있다보니, 이모님이 내심 힘드셨던 것 같았다. 2년이 못 되었을 즈음 먼저 그만두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언뜻 보기에도 새 이모님은 집안 형편도 좋으셔서 생계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 또한 만족도가 높지는 않았기에 언젠가 그만두신다 말씀을 하시면 잡지는 말아야겠다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먼저 얘기를 들으니 당장 아이들을 누가 케어해야 하나 앞이 캄캄했다. 한편으론 아이들 등살에 어지간히 힘드셨겠지 이해도 갔다.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었다. 내가 육아휴직을 쓰거나, 새로운 이모님을 구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겐 가족같이 잘해주신 옛날 이모님과 새로운 이모님 2명 뿐인데, 세번 째 이모가 생기면 아이들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 남자아이들 두명은 기피대상 1호라는데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옛날이모님에 대해 말하자면, 첫째 6개월 때부터 봐주셨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산후조리를 포함해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우리가족에게는 은인 같은 분이다. 첫째가 4살 즈음 가족사진을 찍었었는데, 사진액자를 집에 걸 때 아이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엄마, 이모는 왜 사진에 없어?” 원래도 알았지만 우리아이들에게 옛날이모님은 정말 가족보다도 더 가족같이 사랑을 많이 주셨다.


이모님은 아이들을 예뻐한 것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배려도 많이 해주셨다. 직장이 멀어서 곧잘 퇴근시간을 넘겨 집에 도착하곤 했던 시절, 얼굴 하나 안 찌푸리고 오히려 얼마나 피곤하냐며 나를 따뜻하게 챙겨주셨다. 내가 고용주의 입장이 되어보니 직원의 마인드는 어떠해야 하는지 마음을 다잡게 될 정도였으니 여러모로 참 고마운 분이다.




새 이모님의 사직 통보를 받은 10월부터 오랜 고민을 하다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명색이 엄마인데 아이들을 계속 남에 손에만 맡길 수는 없다고. 아직 어릴 때 직접 품어서 키워보겠노라고. 회사업무가 바쁜 시기인 다음 해 1월까지 근무를 하고 2월부터 휴직을 시작했다.

2020년 2월은 전국적으로 코로나19의 조짐이 시작되었을 즈음, 코로나 바이러스가 매일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확진자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등교가 마비되고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면서 주변에서는 육아휴직 타이밍이 절묘하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당시엔 코로나시국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생애 첫 육아휴직을 맞이하고 나니 처음엔 육아와 살림이라는 일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생산성도 성취감도 보상도 없다는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던 때다. 설상가상으로 외출자제 분위기로 집안에만 있으려니 하루하루가 매일 같은 날 같았다.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더 이상 태엽이 돌지 않는 인형처럼.


하루는 거실과 아이들 방에 있던 커다란 책장과 TV 등 가구 배치를 바꾸면서 쓰레기를 한 보따리 버리는 정리를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리를 하고 나니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가 명확히 보였다. 휴직 이후 처음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낀 순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왼쪽 턱과 목 사이에 동그란 계란 같은 덩어리가 만져진다는 걸 알아챘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이전 해 가을께부터 좌우가 다르단 걸 알았던 것 같다. 약 5개월 전에 자각을 했지만, 당시엔 내 몸에 귀 기울일 겨를이 없었던 거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동네 의원을 찾으니, 원인을 찾아야 한다며 대학병원 소견서를 써주겠노라 했다. 이비인후과에서도 내과에서도 마찬가지로 큰병원에 가야한다고 했다.


당시에는 한창 코로나가 창궐한 시국이라 대학병원에 가기에도 두려웠지만 3월 말경, 결국 강남의 ㅅ 대학병원을 찾게 됐다. 감염내과에서 진료를 보고 각종 검사를 해봤지만, 원인이 나오지 않았고, 이비인후과로 트랜스퍼를 받았다.


이비인후과 주치의는 인두와 침샘 주변에 종양이 발견됐는데 크기가 2.5 x 3.5 cm정도로 큰 편이니 수술로 제거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목CT나 초음파, 세침검사(종양의 한부분에 주사바늘을 넣어 물질을 빼내는 검사)상으로 어느 정도 큰 종양이며, 양성으로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고, 별다른 통증은 없었다. 의사 또한 급하게 해야 하는 수술도 아니라고 해서 내심 코로나 이후로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수술을 미뤘다.


그렇게 나는 코로나와 함께 육아휴직의 시간을 보냈다. 열 살과 일곱 살 두 아들을 직접 품어 키워보겠노라, 엄마와의 유대관계를 잘 다져보겠노라 나름의 큰 뜻으로 시작한 휴직이었건만, 코로나19의 변수와 현실적인 문제들로 범벅이 된 시간은 어느 날은 평범했고, 어느 날은 지옥 같았다. 행복한 날은 몇 일 없었던 것 같다.


회사일과 집안일 모두 힘들지만, 쓰는 근육이 다르다. 그 동안 쓰지 않던 근육을 쓰자니 몸도 마음도 피로가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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