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하는 채식인의 건강검진 결과 그리고 체지방률
복싱이라는 운동을 새롭게 시작하고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채식을 하면서 복싱까지 하냐?"라는 질문이다. 채식만으로는 격한 운동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전제가 깔린 다분히 속 깊은(?) 질문이다. 채식 초기만 하더라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불쾌했지만, 이제는 채식을 접하기 어려웠던 이들이 궁금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웃어넘길 수도 있는 여유도 생겼고 자판기처럼 대답이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신한슬 작가의 책 <살 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요>라는 제목처럼 필자는 건강을 위해 채식과 복싱을 시작한 게 아니다. 특히 아름다운 몸이나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혹은 나쁜 놈들을 때려잡기 위해 시작한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잠깐' 체력을 끌어올리려던 목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2년이 다 되어가도록 꾸준히 복싱 체육관에 나가고 있고 어느새 생활복싱대회도 나가고 주말에도 복싱 스파링을 한다. 복싱이 재밌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기를 빼고 운동을 쉬어본 적이 없다. 종목을 바꿔가면서도 꾸준히 다양한 운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운동하는 순간이 그저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늘 자발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육상부와 축구부에 들어간 것도, 중학교 농구 동아리를 만든 것도, 대학 시절 농구 동호회에 가입한 것도, 성인이 되어서 격투기 체육관에 등록한 것도 말이다.
딱 한 번! 처음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부모님이 등록한 태권도장에 다녔다. 하지만 그게 내 근육의 씨앗이 될 줄은 몰랐다. 몸을 한 바퀴 돌려 뒤돌려차기 동작을 배우면서 내게도 놀라운 신체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로 멋진 동작을 하나씩 체득할 때마다 도전하고 성취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비록 무술영화에서 봤던 바람을 가르는 공중 나래차기를 체득하는 데 실패했지만, 다행히도 다리 일자 찢기를 신체 유산으로 남겼다. 성인이 되어서 요가나 필라테스를 수련하지 않고도 일자로 다리를 찢을 수 있는 건 수만 번 다리를 찢었던 사타구니의 수난사(史)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하는 순간이 즐거운 이유는 몰입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왜 운동하는 순간이 즐거운지 알게 되었다. 몰입에 비밀이 있다. 운동하는 순간에는 몰입이 필요하다. 복싱은 발가락부터 손가락, 머리까지 한꺼번에 움직여야 한다. 온몸의 협응력이 중요하다. 흔히 말하는 멀티플레이다. 초기에는 고도로 머리를 써야 한다. 익숙지 않은 동작에 신체 곳곳이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운동이다. 심지어 숨 쉬는 법까지 조절해야 한다.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운동이다.
학생 때는 점심과 저녁 시간에 짬을 내서 농구공을 던지며 학업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 요즘은 복싱을 하면서 샌드백을 '팡팡' 치며 업무 스트레스를 부수어버린다. 샌드백을 치거나 스파링을 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흘리는 땀으로 씻어버린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다.
운동은 반복할수록 실력이 늘었다. 시간은 참으로 정직했다. 어제와 오늘이 확연히 다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달 전과 오늘은 분명히 달랐다. 돌이켜보면 운동한 후에 무엇이 부족한지 깨달았고 자연스레 '무엇'을 '어떻게' 훈련해야 할지 깨달았다. 특히 복싱 스파링을 하면 내 공격 자세와 방어 자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인식한다. 부족함을 인식하고 운동하면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스파링 종료를 알리는 '땡' 치는 종소리가 귀뿐만이 아니라 생각마저 울린다. 자연스레 바둑에서 복기하는 시간과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원투를 뻗을 때 중심이 흐트러지는구나. 방어를 할 때는 가드를 좀 더 올려야겠구나. 결국 러닝머신의 트레드밀처럼 링 위, 샌드백과 거울 앞, 집을 반복하는 복싱 기계가 되어간다.
관절염과 두통이 생겨도, 복싱 또 복싱
이실직고할 게 있다. 복싱이 '건강에 최고'는 아니다. 복싱을 시작하고 관절 부상이 생겼다. 큰 고통이 느껴질 정도는 아니지만 무리라도 하는 날이면 팔목이랑 팔꿈치에 숨어있던 염증이 올라온다.
필자는 스파링을 정말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전력을 다하는 풀스파링을 종종 하기도 하는데 가끔은 다음날까지 두통이 있곤 한다. 가벼운 뇌진탕 증세일 수도 있지만, 승모근이나 목 근육이 뭉쳐서 생기는 통증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냉찜질과 마사지를 해준다.
그럴 때면 수많은 자아 중 하나가 '몸까지 망가뜨리며, 무슨 복싱에 집착하냐고, 미친 거 아니냐'라고 묻는다. 하지만 곧장 글러브 낀 또 다른 자아가 튀어나와 KO 주먹을 날린다. 당연히 복싱으로 훈련된 자아가 훨씬 강하지 않겠는가. 결국엔 '복서 자아'만 생각의 링에 남는다. 그래도 요즘은 건강을 고려해서 스파링 횟수나 강도를 조절하며 안전하게 복싱을 즐기려고 한다.
그럼에도 관절염과 두통이 생길 때면 '어떻게 복싱과 채식을 같이 하냐'는 질문은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무리하게 운동해서 생긴 증세임에도 내심 채식 때문이 아닐지 의심했다. 채식과 복싱을 병행하는 것이 건강에 해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나 보다.
"어떻게 하면 채식하면서 복싱까지 할 수 있을까?"
걱정 어린 질문이 수시로 주치의가 되어준다. 건강을 유지하며 채식과 복싱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자연스레 조금 더 식단에 신경을 쓰게 된다. 최대한 백미를 섭취하는 횟수를 줄이고 현미와 잡곡 식사 횟수를 늘린다. 한 가지 반찬만 준비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채소를 활용한다. 정제 밀가루는 되도록 지양한다.
복싱을 수련한 이후로는 단백질을 좀 더 챙겨 먹는다. 근육이 회복하는 데 단백질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즐겨 먹지 않았던 대체육을 비롯해 두부와 두유를 챙겨 먹고 잡곡에는 콩류를 반드시 넣는다.
채식과 복싱을 꾸준히 하면 몸은 어떻게 변할까
6년 만에 종합건강검진을 실시했다. 채식과 복싱이 만나면 어떤 몸이 될까. 대장 내시경과 위 내시경이 포함된 검진이어서 전날부터 화장실 전쟁을 치렀다. 실험을 위해 시작한 채식과 복싱은 아니지만, 건강 검진 결과가 궁금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건강 검진 결과가 나왔다.
채식과 복싱의 성적표를 받듯 긴장되는 마음으로 펼쳐봤다. 전체적으로 수치는 표준이었고 건강했다. 철분, 전해질(나트륨, 칼륨, 염소, 칼슘, 무기인) 등이 모두 정상 수치였다. 영양제를 먹지 않으면 철분을 비롯한 영양소 섭취가 어렵다는 '채식 괴담'의 공포도 이제는 사라졌다.
다만 당화혈색소가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평균보다 좀 높은 수준이었다. 평소 당이 든 두유와 이온음료를 자주 마셨기 때문인 것 같다. 음료수를 포기할 순 없고 '제로족'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장 놀랐던 점은 키가 컸다. 삼십 대 중반에 키가 크다니. 10년 넘게 175cm였던 키가 176cm가 되었다. 두 달 전에 보건소에서 키를 재고 176cm이 나왔길래 잘못 측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키가 컸나보다. 줄넘기 때문에 닫힌 성장판이 열렸을 리는 없고, 아마도 복싱하기 전후로 꾸준히 해온 스트레칭 덕분 아닐까.
근육량과 체지방량은 어떨까. 체지방량은 12.9%, 골격근량은 33.1kg으로 나왔다. 표준 수치 안에 있다. 육식인의 단백질 타령이 귀에서 맴도는데, 육식인들 앞에서 채식인의 육체미 소동이라도 벌여야 하나. 스스로도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지난날들이 있는데 이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생활복싱대회도 간간히 나갔고 출석하는 체육관에서도 주 1회 이상 스파링을 한다. 그런데 근력이나 체력으로 밀렸던 적은 많지 않다.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함께 운동하는 이들이 내 실력에는 갸우뚱할지라도 체력과 근력에는 놀라는 눈치다. 직업이 운동선수는 아니지만 복서의 심장을 지녔다고 믿는 필자는 이러한 반응이 내심 뿌듯했다.
필자의 사례가 이례적이진 않다. 잘 짜인 채식 위주의 식단이 운동 수행에 효과가 있다는 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고, 책 <채식하는 운동선수>에 세계적인 운동선수와 채식 이야기가 잘 정리되어 있다. 복서 중에는 대표적으로 세계 챔피언이었던 데이비드 헤이 선수가 있고, 누구나 아는 마이크 타이슨도 은퇴 후에 채식을 하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에는 한국 KBM 슈퍼웰터급 챔피언이었던 김용욱 선수도 비건 식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새로운 운동 슬로건, '건강 제일'에서 '재미 제일'
건강을 위해 복싱을 시작한 건 아니다. 복싱 운동 특성상 관절염과 두통을 얻었고, 지방은 적은 근육질 몸을 얻게 되었다. 오히려 복싱을 더 잘하고 싶어서 먹는 것도 신경 쓰게 되고 수면 습관도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숙면이 보약이라는 걸 복싱을 시작하고 절실히 깨닫고 있다. 복싱을 통해 내 몸을 돌아보게 된다.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강해지고 있는지. 어쩌다 보니 건강에도 신경 쓰고 있다.
사실 건강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운동만 찾는다면 몇 개 남지 않을 것이다. 재밌는 운동은 관절이나 근육에 평소보다 빈도는 많이, 부하는 더 크게 주기 마련이다. 약간은 위험하니까 재밌는 거다.
한 해가 50일도 남지 않았다. 연초에 가장 많이 세우는 목표 중 하나가 운동하기 아닐까. 운동 슬로건을 '건강제일'에서 '재미 제일'로 바꿔보면 어떨까. 건강해야만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재미를 추구하다 보면 어느새 운동에 미쳐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운동의 참맛을 느끼면 헤어 나올 수 없다. 한평생 목표인 다이어트라는 목표를 덤으로 달성할지도 모른다. 아직 복싱만큼 재밌는 운동을 찾지 못했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자신이 찾은 보물 운동을 여기저기 소개해 주면 좋겠다. 건강을 위한 운동이나 살 뺀 운동 이야기 말고 재미있는 운동 이야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