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그대로 느끼고 보기
첫 발을 내딛기 전, 완전 다른 세상일거라 생각했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거라는 막연한 설레임으로 발을 디딘 이곳에서 일상을 보낸지 어느덧 29일차(2017년 1월 27일)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두려움이 아쉬움으로 바뀐 지금은, 이곳에서의 생활한 날을 헤아리게 되면 ‘어느덧’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처음엔 마주치는 사람 마저도 마치 그림처럼 느껴지고, 내 발이 딛고 서 있는 길조차 현실 세상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었는데, 어느덧 그 풍경속에 아이들과 나, 우리가 있다.
내일은 음력설날이다. 여기 왔을 때부터 거리 곳곳이 십이지간 동물과 전등으로 꾸며져 있었고, 상점마다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풍경만봐도 이곳에서 음력설을 얼마나 큰 명절로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늘 가는 곳곳이 사람으로 붐볐는데, 음력설 이브인 오늘은 상점들이 거의 문을 닫았다. 어제 밤에 집에 들어올 때도 거리가 많이 한산했는데, 오늘은 오전부터 확실히 사람들이 안 보인다. 내일 모레면 우리도 가족들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사람이 없는 거리의 적막함이 살짝 내 마음에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누가봐도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이방인으로 보였던 내가, 어느덧 풍경속에 머물며 이방인이 아닌줄 알고 있었는데… 오늘 새삼스레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느낌에 그동안 이방인이 아닌척 한 건지 생각도 들지만,
그저 하루 하루 구분 없이, 순간 순간 치열하게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며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 뿌듯함도 살짝 든다.
“해야한다”는 일들로 부터, 짓누루는 막연한 부담감의 무게로부터 해방감을 느끼고자 왔으면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또다시 to do list를 작성하며 바쁘게 생활했었던 것 같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이들 본연의 모습을 보게되면서, 차즘 “해야한다”는 강박감을 많이 놓긴 했지만, 집을 나서면 오래도록 몸에 밴 습관때문에 자연스레 어디로 갈지 목적지를 설정하고, 방향을 정했었다.
오늘은 목적지 정함도 없이 그냥 그동안 다녔던 이스트코스트 쪽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뭐가 있는지 검색도 기대도 없이 그냥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뭘 기대하진 않았지만, 근데…그 동안 걸어온 동네와 분위기가 완전 다르다!
우리 집에서 바로 한 블럭 뒤인데…정말 고요하고, 새로운 풍경의 길 위에 우리만 있다.
이사온 날부터 “해변” 찾는데 집중하고, 이쪽으로 올 생각을 지금까지 못해 바로 집 뒤에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는게 그저 신기하다. 해변으로 가는 길엔 높은 아파트가 많았는데, 여긴 건물들이 낮고 집들 사이 사이에 사원들도 보인다.
1시간 정도 낯선 설렘을 느끼며 산책했다.
1시간… 물리적으로 길지 않은 시간일 수 있는데 날씨가 참 다양하게 바뀌었다. 소나기가 오다가, 살이 따가울 정도로 강한 햇빛이 나다가 분무기처럼 다시 비가 뿌리고, 어느새 빗방물은 사라지고 구름 가득껴 어두컴컴한 하늘의 모습까지, 정말 다양한 날씨를 보인다. 이런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 당황하지 않고 묵묵히 산책을 하는 우리들, 스스로의 존재감이 새삼 느껴지고, 뿌듯함마저 든다.
엄마가 원하던 “반대” 동네 한 바퀴 시도를 마치고, 아이들이 원하는 “쇼핑 센터 분수”에 가서 놀았다. 햇빛나는 날씨에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더니, 우리나라 초겨울 추위로 변했다.
싱가포르에서 이렇게 추워서 벌벌 떨줄 상상도 못했다. 엄마는 벌벌벌 떨고 있는데 아이들은 거센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는 것이 그저 즐거워 보여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좀 더 추위를 견뎌봤다.
기대와 다른 상황, 예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예전의 나라면 많이 당황하고, 잠시도 참기어려워 했을 것 같다. 아이들 덕분에, 이제는 이런 상황을 좀 더 자연스럽게 즐기고, 견딜 수 있게 된 것 같다.
흘러가는 대로 행동하고,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기니
우리 셋,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그저 감사하다.
물에 젖어 우리를 춥게 만드는 옷을 마른 옷으로 갈아 입고, 집에서 잠시 쉬었다가 또다시 해변 놀이터에 갔다.
싱가포르에 오기 전, 내가 느끼던 압박감에서 헤어나오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압박감을 아이들에게 더 이상 전달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놀이터를 찾고 싶어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 싱가포르에 와서도 강박적으로 놀이터를 찾아봤다. 처음 찾아간 놀이터에는 정글짐 하나 뿐이었다. 내가 상상한 모습의 놀이터와 거리가 있다보니 실망스러워 순간 멈짓하며, ‘과연 이 곳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몰려드니, 눈물까지 솟았다.
싱가포르에 왔는데, 이곳까지 찾아와 만난 놀이터에서 내가 정해놓은 기준을 볼 수 없게 되자 절망감이 몰려오고 두려움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절망감에 멈춰있다 미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골려 아이들을 찾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정글짐에 올라 저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아이들 표정을 보니…내가 아이들 눈이 아닌 또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절망한 거라는 사실을, 아이들 덕분에 또 깨닫게 되었다.
여기 잘 온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굳이 싱가포르, 낯선 곳이 아니어도 됐을 것 같지만, 나의 어리석음은 익숙한 일상에선 쉽게 깨지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가 아니어도 됐지만, 나는 이곳에 잘 온 것 같다.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막막함에 절망감을 느껴보지 않았다면 온전히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고, 아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지 못하고,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 같다.
집에 돌아오는 길, 설날 이브날이라 상점들이 거의 문을 닫아 어두운데, 아이들이 드레곤프루츠가 너무 먹고 싶다고 둘이서 다녀온다고 제가 늦은 저녁밥을 안치는 사이 나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가서 “그래”하고 나도 자연스럽게 대답하긴 했는데, 새삼 ‘그래도 되나’, 생각이 든다.
‘안돼’, ‘안돼’가 아니라 ‘돼’, ‘돼’라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바뀐 것 같아 흐뭇한 맘에 시간을 보니 밤 9시가 넘었다. 아무리 치안이 좋다고 하더라고 이 늦은 시간에 만 5살, 7살 두 아이가 나가는 것에 너무 걱정하지 않은 나의 태도에 깜짝 놀라 급하게 나가보니 둘이 사이좋게 오고 있다.
그리고 나를 보곤, 예쁜 용과로 골어왔다고 거스름돈과 함께 자랑스레 내민다.
역시… 아이들은 엄마보다 훨씬 용감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오늘 밤, 나도 용기내 한달살이 시작하며 멍들었던 왼쪽 발 네번째 발가락 발톱을 다 뽑았다.
한 동안 새로 나오는 발톱을 보며,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볼 수 있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