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다르지만 같은 방향으로, 약주&네추럴와인
지난 8월호 월간 주방장에서 네추럴와인을 처음 접하며 약주와의 연결고리를 살짝 언급했다. 마시면 마실수록 익숙한 약주 같은 느낌이 들던 네추럴와인. 코로 향을 먼저 마시고, 눈으로 영롱한 빛깔을 즐기고, 마지막으로 입안에서 깔끔한 피니시를 느끼는 약주와 와인은 분명 다르지만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양조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이 술들이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 그 무언가를 생각해보면서 와인 중에서도 최근 트렌드에 오른 '네추럴와인'과 '약주'의 방향성에 대해 정리해보기로 했다. 같은 결을 공유하는 약주와 네추럴와인에 대해 먼저 간단히 알아보고, 두 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짚어보며 대세인 네추럴와인의 특징이 한국 약주에도 적용 가능할지 살펴본다.
약주가 네추럴와인과 비슷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맑은술'이라는 특징 때문일 것이다. 주세법상으로도 약주는 "녹말이 포함된 재료와 국 및 물을 원료로 하여 발효시킨 술덧을 여과하여 제성 한 것"이라고 되어있다. 쉽게 풀이하면 약주는 쌀, 감자, 고구마, 오메기 등 녹말이 포함된 재료에 누룩, 입국, 종국과 같은 발효제와 물을 넣고 발효시킨 후, 거르고 도수를 맞추려고 물을 첨가한 술이다. 술덧을 맑게 거르고 물을 첨가하였기 때문에 탁주보다 깔끔하고 노르스름한 황금빛 색을 띠는 편이고, 콤콤하거나 고소한 누룩향이 돋보인다. '약(藥)'주라고 불리기 때문에 종종 약재가 들어갔는지 헷갈리곤 하지만, 자세한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 에서.
*종종 약주와 혼용되는 '청주'의 경우에는 쌀만을 이용해야 하며, 토종 누룩을 1% 미만으로 사용해야 한다. 같은 맑은술이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이 일본술은 청주, 한국의 술은 탁주 /약주로 나누어 아직까지 이 분류가 사용되기에, 맑은술을 통칭하는 복잡 미묘한 두 정의가 혼재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와인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해 아직까지도 관심의 열기로 후끈한 와인, 바로 네추럴와인이다. 네추럴와인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성수동이나 을지로의 힙한 일부 술집과 와인바에서 가끔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전국에 '네추럴와인바'가 속속 생겨날 정도로 현재 주류 트렌드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을 공고히 하고 있다. 보통 와인 보존제인 '이산화황을 전혀 넣지 않거나', 병에 담기 직전에 '최소한의 양'만 넣은 와인을 네추럴와인이라 부른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를 재배하는 과정에서도 유기농 농법이나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을 이용해 손으로 포도를 수확하고, 효모도 자연에서 발생한 자연 효모를 이용해 만드는 네추럴 과실 발효주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물론 네추럴와인 안에서도 포도 농법 방법에 따라, 수확 방식에 따라, 양조 방식에 따라서 갈래가 나뉘기도 하지만 총체적으로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컨벤셔널 와인(Conventional)보다 포도원에서부터 양조하고 발효되고 병입하는 과정까지 와인 생산자의 정성과 손길, 그리고 의미를 더 담은 와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출처: 와인21닷컴 '내추럴 & 오렌지 와인'편
설명이 길었지만 결국 약주는 녹말을 지닌 재료를 발효한 맑은술, 네추럴와인은 과실을 이용해 까다로운 공정을 거친 맑은술이라는 차이점과 공통점을 공유한다. 앞서 말했듯이 두 술은 기본적으로 투명하고 맑다. 더불어 20도부터 40도를 오가는 증류주보다 도수는 낮아서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라기보다 풍미를 즐기기 위해 선택하는 술이다. 시각으로 술의 빛깔을 즐기고 후각으로 아로마를, 그리고 미각으로 맛과 촉감을 다양하게 감각적으로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두 술 모두 대중적인 탁주나 컨벤셔널 와인보다 정성과 공정이 더 들어가기 때문에 가격대가 높게 설정되어 있지만 아직은 전체 주류 시장에서 적은 파이를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인지 아는 사람만 찾아 마시는 애주가 술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약주와 네추럴와인 모두 음미하기 위한 술이라는 같은 꿈을 꾸고 있지만, 약간은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다른 길을 선택했는지는 약주와 네추럴와인만이 지니고 있는 차별점을 몇 가지 짚어보면 알 수 있다.
1) 원재료 선택 폭이 넓다는 점이 약주의 가장 큰 강점이다. 곡식은 물론이고 야채나 약재, 과일 같은 부재료 첨가도 되기 때문에 일반 쌀 약주부터 시작해서 오메기(차조), 버섯, 귤피, 소나무 약주까지 선택하는 재미가 있다. 2) 약주는 네추럴와인과 다르게 화학적 첨가물이 거의 들어있지 않아 '네추럴 약주'가 기본이다. 발효과정에서 별도의 화학 처리를 하지 않고 열처리 정도에 그치지 않아 생약주/살균약주로 구분된다. 또한 네추럴와인이 강조하는 '비건'적인 측면에서도 동물성 여과 절차를 거치지 않아 대부분이 '비건' 약주다. 물론 원재료가 되는 쌀 생산에서 친환경 농법 쌀만을 사용하거나 무농약 재료를 강조하진 않아 네추럴와인이 강점으로 삼는 원재료 생산절차 부분을 부각하고 있지 않다. 3) 보통 375ml부터 500m, 750ml까지 부담스럽지 않은 용량에 만원~삼만 원 선에 퀄리티 높은 술을 구매할 수 있다. 더불어 전통주로 해당된 술은 온라인 구매가 허용되어 있으니 합리적인 가격으로 편하게 택배 배송을 통해 즐길 수 있다. 4) 마지막으로 약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직접 방문할 수 있는 특혜가 있다. 내가 마시는 약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직접 해당 양조장에 방문해서 구입할 수 있다는 점도 국산 약주만의 차별점이 아닐까 싶다. 유명한 해외 와이너리 투어들이 있는 것처럼 한국에도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지정된 양조장에 가면 투어뿐만 아니라 시음 및 구매도 가능하다. 내가 마시는 술의 원산지를 찾아갈 수 있다는 점은 애주가들에게 큰 매력 포인트임은 분명하다.
최근 네추럴와인이 유행의 중심에 서있는 이유는 이 술만이 가진 희소성과 차별성의 진입장벽 때문임이 크다. 1) 네추럴와인은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컨벤셔널 와인과 달리 아직 일반 소매가 활성화되어있지 않아 유통업자를 거치거나, 전문 취급하는 업장에서만 한정 수량으로 접할 수 있다. 이렇게 다소 높은 진입 장벽이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2) 소비자가 직접 진입장벽을 넘어서 네추럴와인을 찾아가면 술뿐만 아니라 공간의 아우라까지 함께 향유할 수 있다. 레스토랑이나 와인바처럼 분위기 있는 공간에서 음미하는 술은 확실히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3) 키치한 예술성을 갖췄다. 투명한 유리병과 익숙한 톱니모양 병뚜껑의 와인, 단순한 스케치나 화려한 라벨 디자인이 그려진 와인까지 한눈에 보아도 네추럴와인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4) 그렇다고 독특함만 앞세워서 허세를 부리는 와인은 아니다. 대중 와인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으면서, 그 이상의 가치를 표방한다. 친환경+현명한 소비+비거니즘까지 소비자가 똑똑하게 소비하는 '선택적 가치'에 집중한다. 포도 생산 방식이나 양조 방식, 그리고 소비 방식까지 네추럴 와인 한 병에 담긴 가치를 마시고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네추럴와인 포도원 재배 방식이나 투명화된 체계, 그리고 이를 단계화하여 새로운 갈래를 만들고 와인 시장의 파이를 키우고 있다. 나날이 커지는 먹거리 환경에 대한 관심과 희소성으로 네추럴와인은 유행의 흐름에 올라탔고, 이제는 지금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트렌디한 술이 되었다.
네추럴와인이 만들어내는 트렌드와 그 트렌드를 위주로 생기는 팬덤을 보면서 아직은 미진한 한국의 약주 시장이 방향성을 잡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벤치마킹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현재 네추럴와인이 만들어가는 가치와 이에 반응하는 소비자의 흐름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고 적용한다면 약주 부흥에 불을 지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동일한 선상에서 포도나 과일이 가진 상쾌한 아로마와 곡물과 누룩의 합으로 만든 녹진한 콤콤함이 비교되긴 어렵지만, 약주만이 차지할 수 있는 또 다른 파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네추럴와인이 하나의 아이코닉한 콘텐츠로 자리 잡은 것처럼 한국의 약주도 멋진 공간에서 술이 지닌 매력을 최대치로 소비자가 음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약주가 관심을 사고 소비가 늘어야 생산자 역시 더 맛있는 술을 빚어낼 수 있는 선순환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유행의 주도는 트렌드에 예민한 생산자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존 한국술 디자인이라는 틀에 갇혀서 제약을 두지 말고 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 등 아티스트 버전 라벨과 마케팅에 재미를 더하며 예술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어떨까. 예를 들면 최근 문배주가 화가 장욱진 아트 에디션을 출시한 것처럼 '좋은 술에 멋스러운 라벨이라는 날개'를 다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약주를 즐길 장소에 한계를 두지 않고 소위 말하는 힙하고 분위기 있는 장소에서, 혹은 복순도가 막걸리처럼 행사장의 웰컴 드링크처럼 어느 장소에서든 편하고 멋지게 즐길 수 있는 술으로 변모해야 한다. 그렇게 점층적으로 약주가 소비자의 눈에 띈다면 약주 애호가를 시작으로 한국 약주 팬덤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