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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Dec 18. 2023

가난하면 더럽고 위험한 집에서 사는 것이 당연한 걸까

[리뷰] 마민지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

어릴 적 우리 집은 자가였다. 예나 지금이나 엄마는 본인의 결단으로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는데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아빠의 똥고집만 아니었다면 여러 채의 집을 굴리며 부자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아쉬워한다. 

"내가 좀 더 대담했어야 하는데. 네 아빠 눈치 보여 못한 게 한이다."


우리는 걸핏하면 외식을 했고 틈만 나면 놀러 다녔다. 바다를, 강을, 산을 누비느라 매해 두 번 이상 피부가 감자껍질처럼 벗겨졌다. 웬만해서는 놀러다니지 않는 가족이 있다는 것도,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친구가 있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돈 때문에 자주 싸웠지만 누구도 검소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젊은 부부는 약간의 성공에 도취되어 이성을 잃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대에 흐름에 떠밀린 것일까. 그러다 IMF가 찾아왔고 아빠의 사업은 와르르 무너졌다. 부유함을 느껴본 적은 없으나 몰락의 감각은 선명했다. 가진 것은 당연했지만 잃은 것은 수치스러웠다. 


생계를 책임지게 된 엄마는 4년간 노예처럼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다 사라졌다. 엄마를 믿고 태평하던 아빠는 그제야 일을 재개했다. 돈이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그는 내가 예전처럼 돈을 써도, 쓰지 않아도 화를 냈다. 밥을 사먹으면 돈 귀한 줄 모른다 했고 라면을 끓여먹으면 밥을 사먹지 왜 이런 걸 먹냐고 언성을 높였다. 


아빠가 싫었다. 일평생 부정을 저지른 것도, 엄마가 떠나게 한 것도,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는 것도 싫었지만 가장 싫은 것은 무능이었다. 돌봄노동을 엄마에게 일임했던 아빠는 집에서 하는 일이 없었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경제활동에서 밀려난 그는 말 그대로 무능했고 잔소리만 늘어갔다. 


집은 점점 도망치고 싶은 곳이 되었다. 그가 어느 날 돈 오백만 원을 쥐여주며 우리 자매를 내쫓았을 때, 서럽고 놀라웠지만 한편으로 시원했다. 늙고 병든 아빠로부터 해방되었다! 나를 내친 것은 당신이다. 내가 아니라. 


이것은 내 개인적 경험이고 가정사이다. 부끄러워 숨겼던 일들. 중년이 된 나는 이 안에서 '그때 그 시절'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가부장제와 성역할, 부동산 불패 신화, 거품 경제, IMF, 그리고 노인 부양 문제까지도.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 책표지 @출판사 클


솔직하고 성실해 놀랍고 또 반가운 책을 만났다.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은 나와 닮고 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히 말하건대 그녀가 경험한 부도, 가난도, 나보다 더 극적이다. 덕분에 나도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으니 자신의 경험을 소재 삼는 작가들이 알았으면 한다. 당신들은 무척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 서울의 40평대 아파트에서 호화 가구를 두고 파출부를 쓰며 일상적으로 모범택시를 이용하던 가족이 있다. 아빠는 골프와 해외여행을 즐기고 엄마는 티타임을 하며 자녀의 스터디그룹을 만든다. 이웃으로는 의사나 변호사가 당연하다. 


그랬던 그 가족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다. 라면 살 돈이 없어 온 집안을 뒤지고 걸핏하면 가스와 전기가 끊긴다. 아빠를 대신해 엄마가 생계 전선에 뛰어들고 저자는 차츰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삶에 익숙해진다. 


그녀는 학교 과제로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부모님의 인생에 부동산이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었는지 알게 된다. 이들의 삶이 한국의 도시개발사와 부동산 투기 흐름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동산을 통해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것을 경험한 산증인이고 집장사로 부를 획득한 당사자들이다. 


책은 꼼꼼한 조사로 객관적인 근거들을 제시한다. 가령,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소비자물가는 8배, 도시 근로자소득은 28배 상승했지만 택지 가격은 무려 108배 상승했다고. 그 한복판에서 세상을 배웠기에 저자의 부모님은 끝내 부동산을 포기하지 못한다. 


저자는 부동산에 집착하는 부모님을 비윤리적으로 바라봤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엄마가 숨겨 온 본인 명의의 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내심 기대를 갖게 되었다고. 정부 정책이 대거 바뀌지 않는 한 이 흐름을 깰 수 없다.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장점이 많지만 특히 두 가지 이유로 빛나는 책이다. 책은 지난 시대를 되짚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극심한 주거불안정을 경험하며 돈이 없으면 안전을 포기해야 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묻는다. 

"돈이 없다고 해서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게 당연한 걸까?" 248


물론 당연하지 않다. 최소한의 주거는 국가의 책무다. 국민의 기본권 중 사회권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생활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어린이백과에도 나오는 이 내용을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산 것이 아닐까. 


지난한 노력 끝에 저자의 부모님은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게 되고 사람다운 삶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생활에 만족했다고. 한때 사치를 누려 온 이들임에도. 나는 이 부분에 주목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부동산 신화를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작아도 쾌적하고 안정적인 집을 제공하는 것일 테다. 


부동산 투기가 계속되고 집값이 상승할수록 주거불안정성은 심화되고 가난한 자들은 궁지에 몰린다. 노인이 되어도 쉴 수 없다. 폐지 줍는 노인을 쉬게 하는 것은 사회가 할 일이다. 그래야 젊은이들도 부모 부양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가족이 짐이 아닌 기쁨이 될 테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빛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엄마의 삶에 초점을 맞춰 오랫동안 국가 경제에서 비가시화되어 왔던 여성의 위치를 엿보게 한다는 것이다. 1951년에 태어난 그녀는 교육에서 차별받았으나 가족의 돌봄 노동을 도맡아야 했던 딸이다. 놀라운 사업 수완으로 부를 일궈냈음에도 자신은 뒤편에 물러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집 안팎에서 남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뒤에도 남편이 가장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영민한 책 덕분에, 시대를 돌아보고 정부의 책임을 성토하고 싶어지다가 문득 나를 돌아본다. 경제 주체로서, 또 여성으로서 나의 위치는 어디에 있나. 평생 이 문제와 싸울 테고 끝내 아름다운 결론 따위 찾지 못할지 모르지만 내가 선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책은 언제나 반갑다. 조금 아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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