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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Apr 15. 2024

당황스러운 조카의 말에 실없이 웃기

그 시절 나를 떠올리며

어느 공원에서였다.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조카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고 손에 들려 있던 들꽃을 내 귀 뒤에 꽂아 주었다. 나는 이미 아이가 다가올 때부터 늘 그렇듯이 또 반해 버렸는데 그가 하는 말,


"고모가 꽃보다 예쁘네."


늙은 고모 심쿵. 어디서 이런 예쁜 말을 배웠는지.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가 절로 지어지던 찰나, 조카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한다.

"뭐 대가 없어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심쿵한 것이 민망하고 억울해지는 그 말에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으허으허으허.


© andsmall, 출처 Unsplash


엄마는 언제 어디서나 친구를 만들곤 했다. 지금은 더욱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지만 내가 어릴 때는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키우는 여성들을 주로 사귀었다. 살림과 육아에 갇혀 허덕이는 와중에 그런 교류로 겨우 숨통을 틔웠으리라. 엄마는 친구들과 어울릴 때마다 당신의 자녀들과 친구의 자녀들이 잘 어울리기를 바랐다.


S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나이만 같으면 무조건 친구라고 우기는 엄마는 지금도 '옛날 네 친구, S'라고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친구였던 적이 없다. 이건 나만의 깍쟁이 같은 생각이 아니라 그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엄마들이 만날 때 외에는 만나지 않았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한 적도 없다.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녀는 "우유 마실래?" 물어보면 "주스는 없어?" 묻는 아이였다. 오렌지주스를 내주면 "난 포도주스가 좋은데."라고 했다. 얼마 뒤부터는 우리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부터 열었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했다. "뭐 이렇게 먹을 게 없어?"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고하면 엄마는 역정을 냈다. 냉장고에 먹을 게 천지인데 왜 그것도 내주지 않았냐고.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면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을 해야 아냐고. 갈수록 S가 오는 것이 반갑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럭저럭 어울렸다. 종이 인형을 자르거나 인형 머리를 땋기도 하면서.


명절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S에게 세뱃돈을 주자 S가 말했다.

"너무 적어요. 더 주세요."


S의 엄마는 화들짝 놀란 제스처를 취하며 황급히 말했다.

"얘가 왜 이래! 창피하게. 아이고 미안해, 미안해. 내가 민망해죽겠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아이고, 뭘 미안해. 냅둬! 잘하는 거야. S는 어디 가나 똑 부러지게 잘 살 거라고. 우리 애 좀 봐. 얜 어디 가서 말도 한 마디 못 한다니까. S는 아주 잘 크고 있는 거니까 뭐라 하지 마. 알았지? 절대 혼내지 마."

엄마는 주머니를 털어 얼마를 더 쥐여주려 했지만 S의 엄마가 만류했다.


그 명절, 시골에서 막내 고모를 만났다. 정겹고 나긋나긋한 말씨를 가진 고모는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내가 작정했을까, 무심결에 그랬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 건 고모가 세뱃돈을 주었을 때 내 입에서 나간 말이다.

"너무 적어요. 더 주세요."


그 자리엔 고모와 할머니뿐이었고 그녀들은 눈을 마주치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어서 고모는 싸늘하게 말했다.

"서울 애라 그런가. 당돌하네. 고모 돈 없어."


잘못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조카의 말에 고릿적 그 일을 떠올렸다. 이 아이는 어쩌다 그런 말을 배웠을까. 그 뜻은 분명히 알고 있을까. S는 잘 살고 있을까. 그때 그 캐릭터 그대로일까.


뭐면 어떻겠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당황스러운 아이들의 말에 인상 찌푸리지 않고 웃어주는 것뿐. 으허으허으허으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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