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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Sep 03. 2020

비건지향인이 본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리뷰는 아닙니다만

영화를 말하기에 앞서, 십 수 년도 더 지난 옛날 이야기를 소환해야겠다. 그 어느 날엔가 나는 친구과 그녀의 남친, 이렇게 셋이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빠져서는 안 되는 한 사람, 친구가 늦고 말았다. 친구는 문자와 전화로 연신 사과를 하며 조금만 더 기다려 줄 것을 부탁했다.


지금이라면 긴 고민 없이 카페에 들어가 한담을 나누거나, 그도 안 되면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소일하겠지만, 그때의 우리에게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런 조합으로 카페에 가는 것도 조금은 어색하게 느꼈던 듯하다. 잠시 고민하던 우리는 게임방으로 향했다. 내가 게임을 할 줄 아냐고? 전혀. 


친구의 남친은 '카스'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카스라곤 맥주밖에 모르던 나는, 카운터스트라이크의 약자라는 것도 그날 알았다. 친구의 지각이 행여 이들 커플의 다툼의 여지가 되진 않을까 걱정했던 나는 최선을 다해 게임에 임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리액션까지 열심히 선보이며. 


아마 그도 똑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는 꽤 실력자였는데, 그날 처음 하는 병아리를 데리고 게임하는 것이 재미있을 리 만무하다. 욕봤다 둘 다.


나의 물색 없는 친구는 한 시간도 더 지나서야 도착했다. 게임방에서 나오며, 친구의 남친은 친구에게 반쯤 농담을 건넸다.

"니 친구 큰일났어. 카스 빠져서 날 새우면 네 책임이다. 난 몰라." 

천만의 말씀. 내가 카스를 한 건 그 날이 마지막이다. 


속이 울렁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임방에 앉아 있을 때도 미세하게 속이 안 좋아지는 걸 느꼈지만, 단순히 매캐한 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게임방은 흡연이 무척 자유로웠으니.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차멀미가 심한 편인데, 그에 비견할 만했다. 카스에 대한 직간접 경험이 쌓인 친구 남친의 말에 의하면, 게임의 특성상 화면이 계속 뒤흔들리니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괜찮아질까 했지만,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포스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보고 나오는데, 까맣게 잊고 있던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카메라 기법이나 전문 용어는 알지 못하지만, 액션 장면마다 화면이 엄청나게 흔들렸다. 덕분에 깊이 몰입하며 시계 한 번 들여다 볼 틈 없이 러닝타임이 지나갔지만, 그것이 내 멀미를 자아낸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차를 타지 않고, 무언가를 잘못 먹지 않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음에도 이렇게 심한 욕지기를 느낀 건 내 생애 두 번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 옛날의 '카스'와 이 영화는 내게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다시 십 수 년 전 그 날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늦게 온 친구는 미안하다며 곱창을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돼지였던가, 소였던가. 나는 고기를 참 좋아했고, 주변에도 고기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나는 누군가 혐오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음식을 참도 좋아했다. '징그러워서 싫다'는 말을 싫어했다.


꽃등심이며 장조림, 조각조각 베고 찢어 먹는거나 내장 털어 먹는거나 뭐가 다른가. 뼈와 발이 뭐가 다른가. 배인지 머리인지 뭐가 중요해. 죽여 먹는 건 다 같은데 징그럽다니. 남이 먹는데 그 앞에서 징그럽다고 말하는 니 예의가 더 징그러워. 나는 그렇게 위악을 떨었고, 온갖 맛을 즐겼다.


죄의식은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몽실몽실 피어올랐지만, 그렇다고 고기를 먹지 않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계란도, 우유도 먹지 않는다. 집에는 소스를 포함해 그 어떤 동물성 식품도 두지 않는다. 때로 외식을 할 때면 어느 정도의 허용치를 두긴 하지만 (대개 멸치육수다), 더이상 이성을 배반하는 식욕 때문에 괴로운 일은 없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혐오식품(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며 그것)을 포함한 모든 동물성 식품을 퍽 즐겼던 나로서는, 내가 지금 안 먹는다고 해서 그런 것들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남의 섭식에 대해서 말할 의사도 없다. 다만 가감 없이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건대, 살육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갈수록 거부감이 심해진다. 


아마도 내가 그것들과 접촉하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가령,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냉동실엔 고기가 있었고, 자주 내 프라이팬에, 냄비에, 빨간 고깃점을 올렸다. 종종 핏물이 배어나오는 상태의 풍미를 즐겼으며, 때로는 날 것 그대로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볼 기회가 좀처럼 없다. 그러니 어쩌다 보게 되면 화들짝 놀란다. 시장에 갔다가도, 마트에 갔다가도, 정육 코너는 멀리 돌아서 간다. 빨간 그것들이 이렇게 불편하게 여겨질 줄은 채식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미처 알지 못했다. 


유약해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을 (부러워하면서도) 싫어하는 (이중적인) 나로서는 비명이나 깜짝 놀람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그런 일이 발생하고 만다. 요즘의 나는 자주 입을 틀어막는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스틸컷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특히 고통스러웠다. 사람을 폭행하거나 단순히 죽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칼로 난도질 하질 않나, 거꾸로 매달고, 바닥에는 양동이를 대지 않나, 내장을 꺼내고...


15세 관람가를 믿고 갔다. 그에 걸맞게 모든 장면들이 직접적으로 시연된 것은 아니나, 차고 넘치는 암시가 있었다. 저건 영화일 뿐이라는 생각을 집착적으로 하며 봤는데, 그럴 수록 계속해 떠오르는 것은 동물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거리에는 온통 고깃집이 가득했다. 


울렁거리는 속이 격하게 요동치던 화면 때문이었는지, 그 안의 핏빛 영상들 때문이었는지, 나로선 정확히 구분해낼 도리가 없다. 이런 장면들은 범죄 액션물에서는 반드시 등장해야만 하는 필수 요건일까? 청소년에게 허락된 이 영화의 심사 기준엔 모두들 동의하고 있을까? 


타국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영화 속 태국은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공공연한 인신매매가 넘쳐나는 문명을 비껴난 곳이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우리는 타인을, 타국을, 그리고 다른 동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묘사해야 할까. 그리고, 이용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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