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요즘 꿈도 없이 잘 자네,라고 말한 날부터 밤에 꿈을 꾸기 시작했다. 누군가 ‘너는 참 좋아.’라고 말할수록 나는 점점 나와 멀어지는 기분이다.
얼마 전에 수년 만에 만난 친구들이 있었는데, 나는 왜 그 친구들을 만나러 가며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다짐한 걸까. 왜 나는 괜찮은 것처럼 보이려 한 걸까. 그때의 나는 괜찮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그 점이 이상해서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나에게 없는 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니야. 내 상황 보다 더 좋아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말하는 게 힘들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을 꺼내서 요즘은 이래, 그런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는 걸 생각만 해도 심장이 뻐근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다짐했던 것 같다.
며칠 전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무심코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봤는데 바깥쪽이 다 닳은 낡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의 신발도 항상 뒤축 바깥부터 닳았다.
그날 집에 오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슬픈 얼굴만 눈에 걸렸다. 날도 더운데 저 아이는 왜 마스크를 끼고 고개를 떨구고 걷나, 저 아저씨 입꼬리는 왜 한없이 바닥을 향할까? 그런 얼굴들에 마음이 쓰였다.
요즘의 내 마음에 대해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내가 빛 좋은 개살구 같다. 사람들이 내 형편없는 모습을 알아챌까 봐 다가가기 싫다. 어디서도 제 역할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주제에.
역할이라는 말 그러나 지긋지긋해서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고 싶다. 무엇이라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이건 해도 되고 저건 하면 안 되고. 그런 거 없이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고 싶다. 다 무겁다. 너무 무거워.
우리 모두 어딘가에 놓여 있어서 해야 하는 일과 해도 되는 일만 가득하다. 가끔은 해야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날이 있어서 그날은 어떤 것도 뒤돌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일만 실컷, 실수해도 후회하지 않고 미움도 부끄러움도 없이, 비난도 죄책감도 없이 하고 싶은 일만 실컷, 그런 게 있다면.
그날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아마도 오늘과 다름없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는 일이겠지만 그날의 물 한 잔은 다른 날과 달라서 한 모금도 충분하고, 미지근해도 시원하다. 우리 그런 날 만나면 서로가 무엇을 해도 놀라지도 놀리지도 말고 그냥 다 좋다고, 뭐든 다 좋다고 계속 웃으면 좋겠다. 괜찮지 않으면 어때, 한 마디 덧붙이면 안심하고 더 오래 웃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