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야 할 이유
삐삐삐삐익 -!
알람소리에 겨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도저히 몸을 일으킬 기운이 없지만 어쩔 수 없다.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얼굴과 몸을 적신다.
채 말리지 못한 머리칼을 달고 운전석에 앉는다.
룸미러 속 무표정한 얼굴과 퀭한 눈을 들여다본다.
후- 숨 한 번을 길게 내어 쉬고 시동을 건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자마자 진입로부터 막힌다.
아슬하게 차선을 변경해 겨우 도로에 들어선다.
시속 100km로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30분 동안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일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한다.
이대로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고,
차가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만
내가 크게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그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만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기를 낳고 7개월 만에 복직을 했다.
1200명의 아이들이 우글대고 있었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일거리에 파묻혔다.
매일 연이어 터지는 사건사고들을 처리하고
마음이 시커멓게 곪아버린 아이들을 만난다.
머리도 배도 아프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도 잘 안 쉬어져서 죽을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같은 마음이라 잘 안다는 말은 삼키고
그럼에도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로 대신했다.
매번 팔뚝을 걷어 난도질 한 상처를 소독하고
몇몇은 급히 병원을 찾아 입원을 시켰다.
이제 고작 2달 남짓한 시간이 지났건만
내 마음속 우물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여전히 목마른 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오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더 이상 퍼올릴 것이 없다.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나 액셀을 밟는다.
옥죄이듯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아기를 품에 안는다.
종일 떨어져 있던 아기가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깨끗이 목욕을 시킨다.
아기와 조금 놀다 보면 어느새 재울 시간이다.
아쉬운 맘에 잠든 아기를 쉬이 내려놓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정수리에 코를 박고 숨을 쉰다.
그제야 종일 두근대던 심장이 조금 잠잠해진다.
비로소 일과가 끝나도 하루를 끝낼 수 없다.
집안일도 해야 하고, 운동도 하고 싶고
글이라도 한 자 끄적이고 싶은데 실상은
손가락 꼼짝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바닥에 누워 멍하게 화면을 응시하거나
넋을 놓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최선이다.
너무 피곤해서 쓰러지듯 잠들 것 같지만
잠들면 다시 또 찾아올 아침이 두렵다.
눈을 감으면 낮에 본 상처들이 떠오른다.
밤마다 아이들이 죽는 악몽에 시달린다.
누군가는 울고 있고 누군가는 원망한다.
그렇게 뜬 눈으로 깨어 새벽을 맞이한다.
새벽 3시, 4시, 그리고 5시.
한 시간 간격으로 자다 깨어 시계를 봤다.
출근시간이 한참 지나서 출근하기를 몇 번,
막아서는 차들을 들이박고픈 충동이 들었다.
웃음도 표정도 잃고 입을 다문 채로
혼자서 조용히 시들어가기를 몇 주,
깊은 새벽 자다 깨어 숨죽여 울다가
베란다 난간을 붙들고 주저앉아 버렸다.
지금 나는 정상이 아니다.
지금 나는 마음이 아프다.
지금 나는 한계를 맞았다.
지금 나는 치료가 필요하다.
긴 생각 끝에 병원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의사에게 내가 처한 상황과 증상을 설명했다.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게 약을 달라고 했다.
상담이든 운동이든 뭔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당장 기운을 끌어올려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차로 출퇴근을 하고, 하루 8시간 근무를 하고
집안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니
멍해지지도, 어눌해지지도, 잠에 취하지도
않게 해달라고 조건을 붙였다.
매일 밤 잠들기 전 1알의 약을 먹는다.
눈꺼풀이 묵직하게 졸음이 찾아오면서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츰 가라앉는다.
잠든 듯 깨어있 듯 공중을 맴돌던 정신이
몸과 함께 차분히 바닥에 내려와 눕는다.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1알의 약을 먹는다.
정신이 명료해지면서 차분하게 안정이 된다.
해야 할 일들이 하나씩 머릿속에서 정리된다.
밤낮으로 나를 괴롭히던 작열통이 가라앉았다.
몇 달간 미뤄왔던 일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버릴 것들을 버리고, 사야 할 것들을 샀다.
손도 대지 못했던 집안일을 조금씩 해냈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콧노래를 흥얼댔다.
이전의 나라면 이렇게 빨리 결단하고 실행했을까?
차일피일 미루며 고민만 하다 말았을지도 모른다.
고민할 힘도, 고민을 행동에 옮길 여력도 없었다.
이제 마냥 우울과 무기력에 짓눌려 있을 순 없다.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고
책임져야 할 존재가 있고,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
치료의 여정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몸과 마음을 돌보면서
놓치고 잃어버렸던 것들을 하나씩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