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로운 취미 하나를 시작했다. 바로 도자공예다. 유치원생 때 소풍으로 도자공예를 해본 이후 난생처음이다. 처음 강사님이 설명을 해줄 때는 너무나 쉬워 보였지만 역시나 실제로 흙을 만져보니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너무 잘하고 싶다!
내 흙은 아직 기초도 안 잡혀가는데 주변 사람들은 벌써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내 흙을 이것저것 만지다 보니 벌써 모양이 틀어졌다. 물레에서 흙이 굴러가는데 나는 원래 모든 흙이 물레 위에서 가만히 돌아가는 줄 알았더니만 내 흙은 무슨 춤을 추듯이 소용돌이가 되어 돌아갔다.
내 춤추는 소용돌이 흙 (...)을 본 강사님이 헐레벌떡 뛰어와 다시 모양을 잡아주었다. 강사님의 손을 직접 잡고 느끼며 배운 것은, 생각보다 훨씬 압력을 덜 주고 속도를 최대한으로 느리게 해야 모양이 잡힌다는 것이었다.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모양이 바로 일그러졌다. 강사님은 흙은 단지 내 손의 반영(reflection) 일 뿐이라고 했다. 흙이 흔들리면 내 손을 봐야 한다고.
흙을 다듬을 때 겉으로 보면 거의 손이 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정도의 속도로 움직여야 모양이 잡힌다. 첫 2시간 만의 수업으로도 나는 벌써 도자공예가 인생과 참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모든 게 잘하고 싶었던 나.
한국에서의 나는 참으로 지는 게 싫었다. 그때는 공부든 그림이든 노력을 하면 항상 만족하는 결과가 나왔고, 나는 한 번도 타인이 말하는 "노력했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과가 안 나오면 노력이 부족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만큼 노력을 미친 듯이 쏟아붓긴 했지만, 노력한 만큼 결과도 항상 나왔다.
스웨덴, 영국에서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문화차이, 언어장벽, 소수 인종, 여성이라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여러 장애물을 만나면서 내가 노력한 것의 반의 반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나는 내 주변사람들이 이야기했던 '모든 노력이 꼭 성공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이야기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지난 1년간 나는 현 회사에서 2번의 승진을 요구했다. 우리 팀은 애초에 승진 절차나 구조가 만들어 지지도 않은 참혹한 상황(..)이 이었어서 이 기틀부터 잡고 프레임워크가 만들어진 다음에는 비즈니스 케이스를 만들어서 발표했다. 회사 내, 외 동료들의 많은 피드백을 들었고 많은 수정을 거쳤다. 매니저와의 1:1 당일에는 정말 완벽주의자인 내가 봐도 만족스러운 수준의 발표를 했다. 그러나 승진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연히 회사에 대한 불만이 굉장히 컸다. 내가 회사에 다닌 지도 충분히 오랜 시간이 지났고, 내가 이 팀에서 가장 오래 일하면서 당연히 다른 팀원들에 비해 해낸 성과의 양도 압도적이었고 질도 좋았다. 매니저는 내가 낸 성과를 인정해 주면서도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지금 네가 승진이 되지 않는 것은 너의 능력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 회사의 상황 때문이니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BS(Bullshit)이라 생각했다. 회사에서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인재는 어떻게 서든 보상을 해주기 마련이다. 가장 적은 가격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딱 좋은 핑계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충성을 다한 나에게 그 어떤 형태로의 보상도 해주지 않는 회사에게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직을 준비했다. 그리고 6개월 후 퍼포먼스 리뷰 (한국의 인사평가) 시즌이 돌아오자 나는 다시 또 비즈니스 케이스와 함께 승진 요구를 했다.
또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아직은 상황이 아니라고. 나는 그때쯤 이 회사에 대한 모든 마음이 다 떠나버린 상태였다. 어차피 이직을 준비하면서 다른 회사들이 나에게 얼마큼의 금액을 제시하는지, 어떤 급의 포지션을 제안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회사가 나를 평가절하 undervalue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퍼포먼스 리뷰의 매니저 평가 섹션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보통은 한 문단으로 끝내는 글을 매니저가 1페이지에 거의 에세이 쓰듯 꽉꽉 채워서 평가서를 써놓았기 때문이다.
온통 칭찬 일색이었다.
매니저는 거의 소설 한 페이지에 해당하는 글을 나에게 다 읽어주며 "진심으로 내가 할 수 있다면 너를 승진시키고 싶지만, 회사의 사정 때문에 너에게 정당한 대우를 주지 못해서 안타깝다."라고 이야기했다. 매니저의 눈을 보는 순간 나는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 후 우리 회사에서는 정리해고가 있었다. 나는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같은 팀에 있던 디자이너가 떠나는 것을 보면서, 이미 있는 사람도 잘리는 형편에 애초에 회사는 승진을 해줄 마음이 없었구나. 그 말은 진심이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결국 나는 이직을 하게 되었지만,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가 노력한다고 되라는 법이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는 사건이었다. 모든 걸 눈에 보이는 결과 위주로만 생각하면 나는 승진에 실패한 사람이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어서, A4 용지 분량의 온갖 진심 어린 칭찬과 격려를 담은 평가서를 받고 나니, 정말로 요즘 IT, 테크 업계가 경기불황이라 승진을 해줄 수 없는 상황임을, 그리고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고 노력한다고 바꿀 수 없는 부분임을, 받아들이고 보내기로 했다. 어쨌든 나의 성과는 엄연한 사실이고 내 매니저 또한 그렇게 느꼈다면, 그걸로 됐다고 받아들였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2년이 지났지만 나는 가끔씩 그 연애에서 내가 깨달은 교훈들을 반추해보고는 한다. 우연히 보게 된 법륜스님의 영상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괴로우면 '집착'이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마음이 괜찮다면 '열정이다.'
전남자친구가 나에게 집착한다고 느꼈던 이유가 무엇일까? 전 남자친구와 나는 사실 맞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전 남자친구가 억지로 그것을 이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들을 그는 갖고 있지 않았지만, 나와 너무 사귀고 싶은 마음에 그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숨겼다. 그 의도적인 숨김은 연애에서의 부자연스러움과 어색함으로 나타났고 그 때문에 나는 항상 마음 한 구석에 이 연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연애 막판에 그의 거짓말을 들킨 이후로 그는 내내 불안해했다. 항상 새벽에 불안에 떨며 전화를 했고 화를 냈다. 잘못한 건 그인데 내가 처벌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억지로 움켜쥐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배신감을 느꼈고 그는 불안했고, 헤어짐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막으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법륜스님이 말하는 내 마음이 괴로운 이유는, 내 능력이 되지 않는 것을 내가 억지로 잡으려고 아등바등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집착이다. 내가 이미 그걸 가질 능력이 된다면 애초에 불안하지도 않고 마음이 편안하다. 이럴 때는 아직 내가 원하는 것이 내 것이 아니구나, 내가 그걸 품을 능력이 안 되는구나를 인정해 버리면 마음이 편안하다. 그럴 때 성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타인의 피드백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거절이 마음 아픈 것이 아닌 내 성장의 도구로서 유용한 발판으로 삼아질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노력하는 사람", "열정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물레의 속도를 늦추고 손을 가만히 내려놓자 거짓말처럼 모양이 잡히기 시작했다. 잘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고,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내 것에만 집중하고, 가만히 기다리니 그릇 모양이 되었다. 내려놓는 연습, 항상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되지 않더라도 너무 아파하지 않는 연습.. 도자공예를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