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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10억 벌어주고 인사고과대상 된 썰 -마지막-

최고의 복수

by 곰비

영화같은 통쾌한 복수는 없다

비공식이긴 했지만 인사고과 대상(PiP)을 벗어났고 새 회사에서 더 높은 직급과 연봉 제안을 받은 것은 개인적인 승리라면 승리라고 할 수 있으나, 회사에서의 정의구현은 없었다. 켈리의 상사인 찰리는 켈리가 자신의 부하직원들에게 어떤 짓들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만큼 켈리는 계획적이었다. 자신의 상사에게는 정말로 이미지 관리를 잘했고 항상 자신을 남을 위해 희생하는 아이콘으로 포장했으며, 그녀의 횡포 대상은 오로지 자신보다 직급이 낮으면서도 나이가 어린 여자 직원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가 정말 뛰어났던 것은, 그녀는 서면 (메세지, 이메일) 에서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했던 끔찍한 말과 행동들은 녹화나 AI 자동기록이 꺼져있는 미팅 또는 실제 대화에서만 이루어졌다. HR에 정식으로 신고를 해서 이 문제를 증명하려면 모든 것이 증거로 뒷받침 되어야 했다. 나는 그동안 매니저들을 만나면서 단 한번도 녹음기를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거나 몰래 이 미팅 화면을 녹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말 참혹한 현실은, 증거가 없이 직급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서로가 한 말이 옳다는 주장 싸움으로 변질경우, 대부분은 직급이 높은 사람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다. 증거가 없었다는 것은, 신고를 해봤자 내 등에 '매니저를 신고한 부하직원'이라는 낙인을 새기는 행위였다. 그리고 이 경험은 앞으로, 내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마주칠 때 무조건 제일 먼저 증거를 확보해야 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다.


생각보다 흔하게 벌어나는 사건들

이 일을 겪고 주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 생각보다 이러한 불합리를 겪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것에 놀랐다. 인종, 국적, 나이, 직급과 상관없이. 남들이 다 아는 유명 빅테크 회사에 다니다가 부당한 일을 겪었는데 이 일을 발설하지 않는 대신 많은 돈을 받고 회사에서 나가야 했던 사람, 번아웃이 왔는데 성과 점수를 낮게 주어 인사고과 대상이 된 사람, 그냥 매니저가 본인을 마음에 안들어 해서 한 달만에 저성과자로 찍혔고 바로 정리해고를 당한 사람, 밤낮 없이 일을 했는데 구조조정 대상이 되고 저성과라는 표면적인 이유로 잘린 사람 등등.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사조직이고 이론상으로는 성과를 내는 인재를 자를 이유가 없지만, 이 '평가'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가를 느끼게 했다. 어린시절 공부라는 것은 굉장히 명확했다. 투명하고 공정한 평가 시스템이 있고 알아야 할 범위가 확실하고, 문제에 이르는 정확한 논리와 답이 있었다. 그걸 열심히 공부하면 되었다. 그러나 회사에서의 평가라는 것은, 성과 지표 뿐만 아니라 매니저의 개인적인 관점이 들어가는 굉장히 주관적인 결과였다. 내가 이 회사에서 다니면서 만난 총 4명의 매니저와 거의 백명은 되어갈 법한 직, 간접적으로 협업한 동료들 중에서, 내게 부정적인 평가를 준 사람은 이 한 명 밖에 없었지만 그 한명이 매니저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 물론 겉으로는 우리 회사도 360도 피드백이라면서 다양한 이들의 피드백을 받고 평가에 반영하게 되어있지만, 내 매니저는 내가 다른 동료에게서 받은 피드백들을 싸그리 무시해버렸다. 물론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스템이라면 부정적인 평가를 줄 때 매니저 외의 다른 동료의 피드백들도 고려되어야 했지만, 매니저가 무시하고자 마음먹으면 그걸 되돌릴 수 있는 시스템은 없었다.


켈리의 다른 부하직원

주관적인 평가 시스템과 동시에 나의 주장을 더 약화시킨 것은, 그 당시 나와 같이 켈리를 상사로 두었던 부하직원 마야였다. 마야는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문제는, 켈리가 그녀를 계속 쪼아대면 쪼아댈 수록 그녀는 '자신이 부족하다' 면서 자책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켈리가 마야 자신 스스로를 불완전하게 느끼고 본인에 대한 의심을 하게 만들었음에도 마야는 계속해서 켈리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때 같은 부하직원들끼리 똘똘 뭉쳐서 의견을 합하면 주장의 신뢰성이 올라가지만, 마야는 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조사를 했을 때 켈리를 아무 문제없는 상사로 평가해 나를 낙동강 오리알로 만들었다. 마야는 나보다 업무 경험도 많고 직급도 높았지만 자존감이 굉장히 낮았다. 그걸 켈리는 철저히 이용했다. 마야의 이런 행동에 대해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마야는 지금 전쟁 중인 나라 출신에 그 나라에 남아있는 가족과 통화도 잘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외국인 신분으로서 그녀를 안전한 유럽에서 거주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이 취업비자 - 그걸 위해서는 어떻게든 고용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상황은 나를 불리하게 작용했지만 마야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켈리에게 당한 또 다른 사람

이 일련의 모든 상황들은 참으로 재수 없게도 나만 혼자 문제아가 되는 스토리 텔링에 일조했다. 나에 대해 불평하는 켈리의 뒷담화를 들은 사람들은, 나를 보면 일단 경계했다. 물론 그 경계는 실제로 나와 일을 하면서 누그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편견을 가지고 있는 상대와 협업을 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회사에 아무도 내 편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일어나는 어떠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타이밍에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다른 팀의 동료 한명이 내게 다가와서 켈리의 행동에 의문을 제시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이 회사에서 4년간 일하면서 단 한번도 켈리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도 역시나, 켈리보다 어린 여자 직원이었다. 우리 둘은 바로 서로가 어떤 일을 겪었는 지 알아차렸다. 회사의 구석진 조용한 미팅룸 안에서, 나는 그녀에게 모든 상황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켈리에게 어떠한 반대나 다른 의견도 낼 수 없는 상황임을 알렸다. 그녀는 놀라워하며 지금까지 켈리가 자신이 다른 팀임에도 불구하고 시도 때도 없는 마이크로매니징과 무례한 언행 때문에 켈리를 자신의 상사에게 이야기했고, 자신의 상사가 켈리를 자신이 하고 있던 프로젝트에서 빼내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하긴 켈리나 켈리의 상사 찰리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줄리는 없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내가 정말 미치지 않았음을, 이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확인해주는 작은 위안이 되었다.


나타나는 또 다른 피해자

내가 팀을 옮기면서 켈리의 팀에 새로 두 사람이 들어갔다. 그 중 한 명이 켈리보다 어린 여자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그녀에게 "도망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녀와 친하지 않고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말을 섣불리 했다간 나만 바보가 되는 수가 있었다. 나는 새 팀에 집중했다. 새 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록 켈리가 내게 내린 과거 평가의 신빙성을 떨어뜨릴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그 켈리의 새로운 부하직원 중 한명에게 메세지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혹시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XX님이 팀을 옮기신 이유가 혹시 저랑 비슷한 이유 때문인가 싶어서요."


그녀와 나는 곧바로 밀폐된 미팅룸으로 이동했다. 나를 만나자마자 그녀는 쌓인게 많았는지 폭포수같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정말 놀랍게도, 켈리는 정말 토씨 하나도 안틀리고 내게 했던 행동 심지어 말 하나하나 까지 똑같이 그녀에게 반복해왔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 괴로웠다. 그녀에게 도망치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가 나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었던 것이고 나 말고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건 내가 바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첫 상사로 이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미 팀을 옮겨달라고 요청했고 새 팀에 면접을 봐서 합격까지 받아놓은 상태였지만, 켈리가 온갖 변명과 핑계를 대며 나를 보내주지 않았듯, 그녀는 정확한 팀 이동 날짜 없이 하염없는 기다림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공감해주고 보듬어주고 서로의 앞길을 응원해주며 대화를 마무리했지만, 그녀는 6개월이 지난 지금도, 팀 이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에서 굳건한 켈리

빌의 새 팀에서 일을 하면서 AI 관련 프로젝트들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AI 를 주 업무로 맡는 타 부서와 협업을 할 일이 있어 그 새로운 부서의 팀원과 미팅을 한 날이었다. 스몰톡을 하며 가볍게 인사를 하는데 그녀가 지나가듯이 켈리와 자신이 협업한 프로젝트에서 켈리와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흘리듯이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모르는 피해자가 또 있구나 싶었다. 그녀와 친해지면서 알게 된 사실은, 역시나 켈리보다 어린 여자 직원이었던 그녀에게 켈리가 무례한 행동과 마이크로매니징을 했고 그녀가 타 부서 팀장이자 켈리의 상사인 찰리에게 이 일을 전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과거 찰리와 가깝게 일하면서 찰리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찰리에게 이 문제를 알아보겠다는 답변을 들었으나, 아무래도 그녀와 찰리,켈리가 다른 팀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그 이후로 전해 들은 것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위에 언급된, 켈리에게 6개월이나 묶여있는 켈리의 또 다른 부하직원이 내게 이야기 해준 사실을. 그 부하직원이 켈리에게 고통받은 사실을 찰리에게 컴플레인 했을 때, 찰리는 그가 내게 그랬듯 켈리의 편을 들었다. 찰리는 켈리에 대한 이 많은 컴플레인들을 듣고도 아무론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내가 켈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시점에는 피해자가 나 밖에 없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밝혀진 피해자만 해도 4명이 넘는데 - 심지어 모두 다 켈리보다 어린 여자라는 공통점! - 도대체 찰리는 왜 켈리를 감싸고 도는 지 알수가 없었다. 피해자들끼리 아무리 짱구를 맞대고 생각해보아도 알길이 없었다.


떨치고 일어나기

진실과 공정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내 특성상, 나는 이 회사를 다니는 동안 정의구현을 목격할 수 있길 바랬지만 내 케이스가 그랬듯 그걸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6년전 내가 영국에서의 첫 정리해고를 당했을 때 아무리 이의를 제기하고 완벽한 논리를 펼쳐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하루라도 빨리 더 좋은 새 직장에 들어가 새로운 사람과 만나며 상처를 치유하고, 좋은 추억을 쌓고, 흥미롭고 의미있는 업무들을 하며 과거의 상처를 잊어가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정의구현을 바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내가 새 팀에서 아무리 인정받고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이직을 성공한다고 해도, 내 머릿 속을 켈리와 찰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채우는, 어떻게 보면 또 다른 집착이었다. 아무리 내가 잘못한 게 없고 떳떳해도, 나를 모종의 이유로 상처를 주고 떠나간 이에게 하염없이 오지않을 답장을 기다리는 부질없음처럼, 이건 나만 깎아 먹는 행위였다. 나는 내 시간과 에너지를 좀 더 유용한 곳에 써야했다.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 나를 편견없이 받아들이는 새 팀과 동료들, 새롭게 시작하는 재미있는 프로젝트, 거기에서 협업하며 얻는 시너지와 긍정적 교류, 새로운 배움,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게 될 직장까지.


가장 최고의 복수

켈리가 내게 한 행동들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겪은 이 경험들은, 내가 앞으로 리더가 됐을 때 가장 권력구조의 아래에 위치한 부하직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입장을 공감해주고 경청하는 거름으로 쓰기로, 나는 결정했다. 마이크로매니징을 당했기에 나도 똑같이 나의 부하직원에게 "나도 이렇게 배웠어." 라며 합리화된 마이크로매니징을 하기 보다, 마이크로매니징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기에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 리더가 될 것이라고. 번아웃을 당했을 때 다그치기보다, 그 사람의 마음에 우선 공감해주는 리더가 될 것이라고. 같은 여자이면서 여자직원들을 더 가혹하게 대하고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해서 불평등에 일조하기 보다, 같은 여자로서 여자직원들을 더 지지해주고 응원해주고 그 사람이 성장을 할 수 있게 성심성의껏 돕는, 그 사람이 나와 생각이나 행동이 다를지라도, 다름을 배척과 통제의 이유가 아니라 다름 자체가 팀을 더 풍요롭게 하는 자원임을 인정하고 붇돋을 수 있는, 매니저의 권력을 이용해서 부당하게 타인을 깎아내리고 괴롭히지 않고, 그 권력을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쓸 수 있는.


물론 매니저, 리더가 된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내 통제 안에 있지 않을 것이고 내가 모든 결정에 관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관리하는 한에서만큼은 이 끔찍한 대물림이 이루어지지 않게. 나는 선택할 수 있고 노력할 수 있었다.


나는 다짐했다. 가장 최고의 복수는 켈리를 떠나 그녀보다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켈리는 그녀가 당한 성차별을 대물림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켈리는 나를 인사고과 대상으로 만들었을 지언정 내 생각을 바꾸지도 못했으며 내가 옮긴 새 팀, 새 회사에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진정한 영향력은 권력으로 찍어누르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켈리는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녀는 평생 그렇게 살 것이다. 타인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통제와 권력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침묵할 때 그녀는 그것이 정말로 타인을 변화시킨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 것이다.


내가 이들을 바꾸거나 교화시킬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가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좀 더 나은, 바른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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