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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10억 벌어주고 인사고과대상 된 썰 -7-

인사고과 대상에서 벗어난, 그다음은?

by 곰비

탈출전략

인사고과 대상이 됐다는 건, 그 억울함과 부당함을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왔다. 켈리의 마이크로 매니징을 일일이 상대하며 많은 양의 일을 처리함과 동시에, 그녀가 기분이 좋을 땐 연락이 하루 종일 없다가도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총알 쏘듯 발사해 대는 말도 안 되는 업무와 메세지들을 불평 하나 없이 웃으며 받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걷기였다. 인사평가 점수 자체도 그녀의 감정적인 행동의 결과였기 때문에 인사고과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도 켈리의 감정에 따라 언제든지 좌지우지될 수 있는 변수가 있었다. 하지만 인사고과 평가를 받은 그날부터, 나의 진짜 목적은 탈출이었다. 켈리의 충실한 개 되기 전략은 켈리에게서 탈출하기 전까지 최대한 불필요한 고통과 싸움을 줄임으로써 내 에너지와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었으므로. 나는 켈리에게 연기를 하는 단 하루도, 탈출 전략 실행을 멈추지 않았다.


메타, JP 모건, 몬조, 스카이스캐너, 낫웨스트(Natwest) 은행

일이 끝나면 온 힘이 빠져 너무나도 간절히 침대에 눕고 싶었으나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구원해 줄 이는 없었다. 나는 2주 안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끝냈다. 그리고 새로운 회사 지원을 시작했다. 취업비자를 지원받아야 한다는 불리함이 있었음에도 곧 연락이 왔다. 메타, JP 모건, 몬조 (영국 유명 핀테크 스타트업), 스카이스캐너, Natwest 은행 총 5곳과 인터뷰들을 진행했다. 대부분 내 현 회사 직급 바로 위의 직급들이었다. 이 회사들과 동시에 인터뷰를 진행하는 경험은 나를 원하는 회사가 이렇게 많음을, 그리고 내가 현 회사에서 얼마나 평가절하를 당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인터뷰 진행이 될수록 자신감을 얻었다. 켈리가 회사에서 내 성과를 까내리는 말을 해도, 외부 회사 리쿠르터들이 내게 현 회사보다 훨씬 높은 직급과 연봉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내 실력이 단순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외부 시장에서 확실히 검증받고 인정받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새 매니저와의 면접

5개의 회사들과 면접을 진행하더라도 최종 오퍼를 받기 전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기에, 나는 새 팀으로 옮기는 전략도 놓지 않았다. 탈출 선택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켈리에게서 단 한순간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이 회사를 언젠가 떠날지라도, 정말 간절히 단 하루라도 숨 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팀장 찰리에게 새 팀 이동이 언제 가능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찰리는 곧 새 팀의 매니저와 내가 1:1로 면담을 할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새 팀 매니저는 나이 지긋한 백발의, 사람 좋은 인상을 한 영국인 아저씨였다. 아무리 더워도 긴팔 셔츠를 입고 급한 일이 있어도 절대 뛰거나 동요되는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는, 영국인 중산층하면 대부분 떠올리는 이미지의 중년 백인 아저씨였다.


이 인터뷰는 내가 새 팀으로 이동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회였다. 나이 지긋한 이 아저씨는 회사 안에 위치한 카페로 커피나 마시러 가자고 했다.


사무실에서 만나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카페로 이동해 커피를 시키는데 그는 자연스레 내게 어떤 음료를 마실 거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당시 카페인을 끊은 상태여서 마시지 않겠다고 하자 당연히 자기가 사는 것으로 생각했던 그는 살짝 당황했다. 나는 그런 반응들이 반가우면서도 낯설었다. 켈리는 커피 한 잔은커녕 자신의 부하직원과 공식적 면담이나 회의 외에 시간을 따로 내주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

사내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가장한 대화는, 매우 편안했다. 새 팀 매니저 빌은, 그냥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나는 내가 어떻게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는지, 왜 내가 디자인 중에서도 그래픽이 아닌 UX UI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떻게 스웨덴에 혼자 공부하며 일했고 현재 영국까지도 오게 되었는지, 내 스토리를 이야기했다. 빌은 그저 나라는 사람 자체가 궁금해 보였다. 그건 켈리와 전혀 반대의 성질의 것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끝내자 빌은 굉장히 감탄한 듯하면서 흥미로운 듯 부가적인 질문들을 이어나갔다. 30분으로 예상했던 대화가 45분이 다돼서야 끝이 났다.


빌은 오늘 대화 너무 즐거웠다고, 앞으로 빌의 매니저인 제임스를 통해 연락을 주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곧 빌의 매니저인 제임스랑도 곧바로 면접이 잡혔다. 빌과의 대화보다는 좀 더 포멀 한 느낌이었으나 제임스 자체도 사람 좋은 아저씨라는 인상이 강했다. 사실 이 대화는 면접이라기보다는 제임스가 우리 팀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 보라는 질의응답 시간에 더 가까웠다. 런던에서 회사를 3번이나 옮기면서 경험한 나의 촉은, 이 면접이 진짜 면접보다는 그냥 마지막 도장 찍기 전 얼굴 확인 정도의 대화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촉은 맞았다. 나는 바로 빌, 그리고 제임스로부터, 팀에 들어와도 좋다는 확인을 받았다.


나를 보내주지 않는 켈리

외부 회사들과 면접을 진행하는 중에, 팀 이동이 확정된 것은 확실한 승리였다. 어쨌든 이직을 할 거지만 회사를 떠나기 전 하루라도 켈리 밑에서 일하기는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빌과 제임스가 내 팀장 찰리에게 팀 이동을 전해주자 찰리는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뻐했고 그 소식은 켈리에게도 전해졌다.


그런데 정말 웃기는 건, 항상 나를 일 못한다고 갈구고 꼽을 주던 켈리가 나를 보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예전에 내가 정말 "일을 못한다"라고 생각했으면, 인사고과 대상에서 벗어났어도 나를 빨리 다른 팀에 보내는 게 켈리에게도 좋은 것이 아닌가? 자신의 충실한 딸랑이이자 통제 대상이 하나 없어진다는 게 싫었는지, 그녀는 말로만 팀 이동이 확정되었다고 해놓고 그게 도대체 언제인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물론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그녀가 일부러 회피하는 이 팀 이동 날짜를 대놓고 물어보면 그녀가 기분 나빠할 것임을 알기에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시간은 하염없이 지나가는데 켈리는 나에게 일을 계속 시키고, 팀 이동은 논의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빌이 직접 나서서 켈리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빌은 예의를 중시하는 영국 아저씨답게 차분하게 나의 팀 이동 날짜를 상의하자고 했다. 켈리는 웃으며 알겠다고 하며 지금 팀 일이 너무 많고 바쁘니 곧 연락을 취할 것이라고 했다. 빌은 기다렸다. 역시 켈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빌은 전략을 썼다. 30명이 넘게 모이는 팀 미팅에서, 내가 곧 자신의 팀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깜짝 발표를 해버린 것이다. 그러고 곧 다음날 나는 찰리와 제임스 두 명에게 내 팀 이동 확정 날짜를 받았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지만 전략은 확실히 쓰는 빌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역시, 큰 회사들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단순히 사람이 좋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자신이 주인공인 상사, 부하직원을 위하는 상사.

빌과 제임스가 나를 자기 팀으로 원한다는 사실은 켈리의 심기를 굉장히 거슬리게 했다. 켈리의 통제성향은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남들도 다 맞장구 쳐주고 동조해야 하는 것인데, 켈리가 그토록 평가절하했던, 인사 고과 대상까지 받았던 나를 다른 팀에서 원한다는 것은 그녀의 입장에서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내 팀 이동이 정해지자마자 역시나, 빌의 험담을 했다.


빌은 회사에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빌에 대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한 적이 없는, 인품이 알려진 사람인데도 겁도 없이 켈리는 내 1:1 면담에서 빌의 꼬투리를 잡아 뒷담을 했다. 대부분 별 영양가 없는 것들이었다. 빌이 계속 팀 이동을 물어봐서 자기를 귀찮게 한다던지, 빌이 자기는 바빠 죽겠는데 네 이동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배려가 없다던지 등등..


빌과 켈리의 차이는, 이들과 대화를 할 때 명백히 드러났다. 빌은 부하직원과 대화를 할 때 경청하고, 그 사람이 편안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편인 반면, 켈리는 자기 이야기만 했다. 자기에게 중요한 일, 자기 사생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자기가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힘든지 등등. 매니징이나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전혀 없고 권력행사 말고는 영향력을 어떻게 발휘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팀을 옮긴 후 빌은 정말로 첫날부터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남 뒷담 좋아하는 켈리로부터, 이미 나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과 내가 인사고과 대상이었다는 이 모든 사실을 전해 들었음에도, 나는 그가 나를 어떤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빌은 진심으로 사람들을 호기심과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직원 개개인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빌 외에 다른 팀원들도 그와 비슷했다.


드디어, 이직.

그렇다고 내가 이 회사에 계속 남아있을 것인가? 정말 따뜻하게 대해주는 빌, 제임스 그리고 다른 팀원들로 인해 상처도 많이 치유받고 행복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팀 바이 팀이라지만 팀 하나만 바꿨는데도 이렇게 다른 회사를 다니는 것처럼 모든 게 바뀌다니 그것도 놀랄 노자지만 어쨌든, 내가 이 회사에서 미래를 볼 수 있냐는 것이었다.


나를 번아웃에 밀어 넣고, 불공정하고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평가로 10억이라는 데이터를 싹 무시하고 인사고과 대상에 밀어 넣은 것은 켈리지만, 그 뒤에는 enabler, 동조자들이 있었다. 악의는 없지만 진실을 알아가려고 하지 않았던 팀장 찰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회사의 시스템들. 나는 그런 시스템 안에서 내 미래를 그려나가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전화를 받았다. 길기도 길었던 모든 면접이 끝나고 한 회사로부터. 내가 현 회사에서 그토록 되고 싶었던 시니어 (Senior) 롤에, 현 회사의 시니어 롤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제시한 그 회사로부터 나는 오퍼를 수락했다.


완벽한 탈출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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