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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10억 벌어주고 인사고과대상 된 썰 -6-

매니저의 마음속에 있는 큰 구멍

by 곰비

갑자기 180도 달라진 나에 대한 그녀의 의심

켈리가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 인형 연기를 한지 몇 주가 지난 시점, 그녀는 내 행동이 만족스러우면서도 그 의도가 의심스러웠는지 1:1 면담에서 나를 떠보았다.


"지금 너가 일하는 대로만 하면 참 좋긴 한데, 근데 갑자기 너가 왜 달라졌는지 좀 궁금하네."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 몸짓은 한결 누그러져 보였다. 내가 지난 몇 주간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는 충실한 개 역할을 한 효과가 눈에 보였다.


"인사평가 면담을 하면서 피드백을 받았을 때, 물론 처음에는 그 피드백을 듣는 게 힘들었지만 곱씹어 볼수록 제가 매니저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는 내 중심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고요. 피드백을 읽으면서 매니저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제가 개선해야 할 점이 많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이 상황을 예상해 보거나 준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몇 주간 혼신의 연기를 펼친 탓인지 이 연기는 내 회사생활의 또 다른 퍼소나가 되어 있었다. 눈 한 번도 깜짝 안 하고 내 진심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주절대는 나 스스로에 나도 놀랐다. 나는 진실이 중요하고 그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지만, 그 연기가 필요하다고 납득이 되면 정말 연기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내가 싫어서 그렇지 회사 정치질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정말 잘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스스로에게 놀라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래? 나는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나 자신을 못 돌보는 게 문제인데, 너는 본인만 생각하고 우리 둘이 완전 반대네. 정말 재밌다, 호호호!"


그녀가 정말로 내가 왜 변했는지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HR에 말하면 징계감인 말이었지만 지금 판이 불리하고 증거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건 지는 싸움이었다.


그녀의 황당한 말에 나는 그냥 웃어 보였다.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1:1 면담

매니저와 1:1 면담은 리포트 (부하직원)의 것이다. 리포트의 일 진행 상황, 문제들, 커리어 목표와 계획들을 이야기하고 상사는 들어주고 도와주는 것, 그것이 1:1 면담이다. 하지만 내가 태도를 싹 바꾸면서 켈리는 나와의 1:1 면담에서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기 시작했다. 내 1:1 면담을 켈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만 채우는 경향은 원래도 그랬지만, 나에게 경계를 놓은 후로부터는 대놓고 자신의 감정 쓰레기를 꺼내놓았다.


그녀가 했던 이상한 행동 첫 번째는 바로 다른 매니저들 뒷담 하기였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얼마나 오랜 시간 많은 일을 하며 다른 매니저들은 그만큼 하지 않는지에 대해 불평했다. 그녀가 뒷담을 하는 대상은 우리 회사에서 평판이 좋고, 일을 잘하기로 알려진 매니저들이었다. 물론 나는 그녀의 말에 동조하지는 않되 웃으며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주기만 했다. 이걸 들어주는 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녀가 뒷담을 할수록 그녀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매니저에다가 딱한 사람이기까지 한지 확인사살을 해 주는 것 뿐이었고 그녀가 욕하는 다른 매니저들은 그녀처럼 마이크로매니징을 하지 않기에 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나고 자신의 방식만이 맞음을 인정받고 싶은데 그걸 자신보다 몇십 년이나 어린 직원 앞에서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치는 그 고루한 자존심이 눈에 보여서. 그녀가 이런 말을 할수록 나는 그녀의 안에서 소리치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남들보다 더 뛰어나고 대단한데 왜 안 안 알아줘!!"



두 번째는 바로 그녀의 사생활 이야기였다.


이건 참으로 기이했다. 영국 사람들은 자신의 결혼, 연애 생활이나 가족 이야기 같은 사적인 이야기를 정말로 가까운 소수의 사람이 아니고서야 회사에서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워낙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가까운 동료랑도 잘하지 않았고 주변에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순간 그녀의 묻지도 않은 사생활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과거에 자신이 아들을 낳은 지 몇 달도 안 되어 이혼을 했고, 그렇기 때문에 싱글맘으로서 자식을 혼자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갖은 고생을 했는지 자세한 이야기들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고 회사를 가면 미팅에서 너무 피곤해서 졸았다던가, 회사일을 끝내면 아들을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하고 또 씻기고 재우고..


그래서 이게 지금 나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전혀 없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미소를 지어 보이는 동안 그녀는 계속했다.


그렇게 7년을 살면서 자기가 어떻게 성차별적인 회사들을 거쳐 이 자리에까지 왔는지, 커리어 적으로 승진하고 '성공' 할 수 있었는지. 그동안 남자를 만날 여유조차 없다가 지금의 변호사 파트너를 만나 어떻게 일과 사랑을 다 잡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내게 하는 말 -


"너도 일과 사랑 다 잡을 수 있어! 힘내!"


솔직히 나는 이 대목에서 웃음을 참느라 혼쭐이 났다. 그녀는 자신의 여자 부하직원의 커리어 성장을 도와주지도 않고, 오히려 협업을 지옥으로 몰고 가는 마이크로매니저인데도 자신을 '싱글맘이라는 불우한 상황에서도 지금의 커리어를 일굴어 낸, 일과 사랑을 다 잡은 의지의 여성' 이미지를 만들어 보이고 싶구나.



켈리의 마음속 구멍

정말로 자신의 성취와 자신이 걸어온 길이 자랑스럽고 떳떳하다면, 그걸 오랜 시간이 지나 그것도 회사에서, 자신의 사생활과 전혀 상관없는, 훨씬 어린 부하직원에게 그것도 1:1 면담에서, 회사 사무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까?


그녀의 마음속에 위치한 큰 구멍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몸 서리 처지게 타인에게 자신의 과거를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녀와 전혀 상관없는, 가깝지도 않은 타인인 나에게 자신의 사생활 이야기를 내보이면서 까지.


자신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불안정함 (insecurity) 이 너무 큰 나머지, 내가 회사에서 자신 있게 말했던 내 의견들과 근거들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고 자신의 매니저로서의 정당성과 지위를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키 열쇠였다.


그녀는 성과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이건 성과 문제가 아니었다. 인사고과 대상을 벗어나려면, 일을 더 많이 하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의 마음속 구멍을 채워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가장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 주고, 그녀를 매니저로서 치켜세워주고 그녀의 온갖 무용담(?)을 들어주고 그녀의 편을 무조건 들어준다면, 나는 인사 고과 대상에서 벗어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들이 맞았다.


나는 그렇게 인사고과대상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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