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현실 사이, 친구
그마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
영화와 현실 사이, 그쯤에서, '친구'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J는 기차선로 위에서 기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J의 허리춤을 잡고 선로 옆으로 쓰러졌다. 기차는 내 발끝에 후덥지근한 바람을 남기며 지나갔다. 우리의 짧은 머리카락이 기차가 떠난 방향으로 솟구쳤다. 녀석이 키득거렸다.
"야 이 미친놈아. 진짜 죽을 뻔했잖아."
나는 녀석의 멱살을 쥐고 소리쳤다.
J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낮은 소리로 웃기만 했다. 울음소리인지도 몰랐다.
문일고등학교, 내가 다니던 학교였다. 학교 근처로 기찻길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몇 달 전 지나는 길에 학교 주위로 아파트가 들어선 걸 봤다. 어쩌면 기찻길이 사라졌을 수도 있겠다.
그날 녀석과 나는 교무실에 불려 갔다. 지난밤에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빼먹은 일 때문이었다. 녀석과 나는 같은 반이지만 자율학습 시간엔 다른 반이었다. 나는 내신 1등급이었고 녀석은 하위권이었다. 아이들을 점수로 평가하고 반을 나누던 고3 시절, 1학기가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긴 막대기를 손에 든 담임선생님은 나와 녀석을 불러놓고는 일방적으로 녀석의 머리통만 두들겼다. 이야기의 요지는 이랬다. 너 같은 공부도 못하는 애가 왜 모범생을 꼬드기냐. 못하려면 너만 못하지 왜 멀쩡한 애를 데리고 야자를 땡땡이치게 만드냐. 이런 내용이었다. 긴 막대기가 녀석의 머리에서 통통 튀어 올랐다.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나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심정이 들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선생님을 쳐다봤다. 그때 녀석의 한 손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막대기를 움켜잡았다. 무릎을 꿇고 있던 녀석이 막대기를 잡은 채 벌떡 일어났다. 잠시 선생님과 녀석이 서로 막대기의 끝을 잡고 대치하는 상황이 됐다. 이쪽저쪽으로 끌렸다 당겼다를 하던 막대기가 녀석의 손에 뽑혀서 녀석 쪽으로 딸려왔다. 녀석은 막대기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에이, 이까짓 학교. 그만두면 될 거 아닙니까."
"너그 아부지 뭐 하시노?"라고 선생님이 묻지 않았음에도 녀석은 교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렇게 사람이 아니고 학생을 만드는 학교라면 저도 다니지 않을 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친 나는 녀석을 따라 뛰쳐나갔다.
한참 땅을 발의 앞쪽으로 툭툭 치던 J가 말했다.
"우리 가출하자!"
다시 돌아가기도 난처한 우리였다.
"그래, 까짓것 해보자. 그 가출."
녀석은 아버지가 비상금 두는 장소를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던 나는 500원 동전으로 배가 터지기 직전인 아버지의 빨간 돼지 저금통을 집어 들었다. 출산일이 되기 전 배를 가른 돼지의 뱃속에는 20여만 원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그 길로 서울역으로 향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대전에 도착한 우리는 제법 어른 티를 내며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우리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수중에 가진 돈이 사라지기 시작한 거였다. 우리는 일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웃기지만 녀석은 우리가 처음 술을 마셨던 술집에 취직이 됐다. 나는 대전에서 개천을 매운 자리에 높게 세워진 *플라자라는 곳의 일식집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불안했던 마음은 일자리를 구하면서 해소되기 시작했다. 나는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어쩔 수 없이 일하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럴듯한 소년 가장 코스프레는 잘 먹히는 것 같기도 했다.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야, 도저히 안 되겠다. 난 올라가야겠어."
J가 말했다.
"니가 가라 하와이."는 아니지만 나는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너는 가라. 서울로." 정도였다. 나는 이렇게는 가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녀석은 혼자 서울로 돌아갔다. 나는 대전에 홀로 남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의외로 내 속에 돌발적인 상황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대견해하기도 했다.
가출한 지 한 달쯤 되어갈 때였다. 함께 일하는 형이 말했다.
"오늘 밤에 어디 좀 같이 가자. 머릿 수만 채우면 되는 일이다. 가기만 하면 십만 원쯤 생긴다."
일식집에서 한 달 월급이 80만 원쯤이었던 것 같다. 하룻밤 잠시 참여만 하고 십만 원이면 큰돈이었다. 위험한 일도 아니라고 했다. 나는 주저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형과 함께 도착한 곳은 어둑한 다리 밑이었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빛이 스며들지 못하는 곳에 한눈에 보아도 사오십 명의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지만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들의 모임 맨 뒤에 서서 잘 보이지도 않는 앞을 향해 까치발을 세워야 했다. 조용한 밤이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내가 있는 뒤쪽에서도 들릴 만큼 고성이 들렸다. 그때 누군가 짧게 외쳤다.
"다 죽여."
내 앞쪽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내 옆에 섰던 일식집 형이 나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잘 피해. 여차하면 도망가라. 가운데로 몰리면 안 돼!"
그러고선 그 형은 앞쪽 대열에 합류해서 사라졌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나는 뻘쭘하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가만 서있었다. 서로에게 주먹다짐을 하는 모습은 평생 싸움다운 싸움 한번 못 해본 내가 보기엔 그저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노려보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랑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두 눈에 불을 켜고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 도대체 왜?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지만 금세 그 사내와 마주하게 됐다. 사내의 손에는 하얗고 긴, 푸른 기운이 감도는 칼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다행하게도 몸이 기억하는 무술이 있었다. 내 아버지는 특공무술 사범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특공무술을 열심히 가르쳤다. 십 년 넘게 무어라도 하면 마음과 몸이 기억하는 법이다. 사내는 서슬 퍼런 회칼을 뻗어왔지만 나도 모르게 내 몸은 칼을 피하고 그의 팔을 꺾고 자빠뜨렸다. 의외로 사람의 몸은 각도만 잘 맞으면 쉽게 부러진다. 그는 끝내 칼을 놓지 않았고 그의 팔은 쉽게 부러졌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이 모습을 우리 편이라고 표현하기는 웃기지만, 내가 선 쪽에 있던 형님으로 불리던 사내가 본 모양이다. 얼추 싸움이 정리된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룸살롱이란 곳에서 술을 마셨다. 예쁜 누나가 옆에 있었다.
그 형님은 내 앞에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놓았다.
"의리가 뭔지 아나? 이기 의리다."
나는 그날 밤 그 뭔지 모르는 의리를 새롭게 정립하며 그들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의 식구가 된 나는 다음날 일식집에서 사우나 매표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승진이었다. 매표소에 앉아 표를 끊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대부분 온몸에 문신을 새긴 사내들이거나 업소에 나가는 누나들이 손님이었다. 일식집에서 80만 원쯤 받던 월급이 백오십만 원으로 껑충 뛰었다. 나보다 나이 든 형들이 가끔 머리를 숙여 내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어색했지만 기분 좋은 일이었고 대놓고 그들에게 반말을 하기도 했다. 점점 그들의 세상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칠*파, 경남 지역의 전국구(전국을 관할하는 조직을 말함.) 조직이었다. 그중 중간 보스쯤 되는 형님이 사우나에 방문했다. 양쪽으로 긴 줄을 만들고 허리를 90˚로 접어 형님께 인사를 드렸다. 가슴이 떨렸다. 뭔가 멋진 삶인 것 같았다. 그 형님이 사우나에서 땀을 흠뻑 흘린 후 홀에 나올 때였다. 나를 좋게 본, 사우나에 나를 소개한 형님이 이번 기회에 인사라도 드리라며 칡즙 하나를 들려 나를 그 형님께 보냈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칡즙을 든 채로 그 형님에게 향했다. 누가 봐도 건달인, 덩치 건장한 그분께 칡즙을 드리려는 순간이었다. 왼쪽에 있는 라커 룸 사이에서 누군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가 30cm 가까운 회칼을 빼어 드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나만 본 것이 아니었다. 내 뒤에서 한 사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습이다."
칼을 빼어 든 사내가 형님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 뒤에 사내가 움직이면서 나를 밀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형님 쪽으로 넘어졌다. 나는 형님을 보듬어 안은 상태가 됐고 칼을 든 사내는 내 뒤에, 나를 민 사내는 그 뒤에서 사내를 붙잡았다. 칼은 내 옆구리에 박혔다.
"그마 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라고 말하기도 전에 일은 끝나버렸다.
사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칼을 든 남자를 다른 사내가 뒤에서 붙들었기 때문에 깊게 박히지 않은 덕분이었다. 사태가 마무리되었을 때 형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내 얼굴을 잡고 포옹을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는 살짝 눈물도 고인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이후로 의리의 사내가 되었다. 얼떨결에 충성의 상징이 됐다. 곧 다시 승진을 했고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게 되었다. 형님은 승용차를 선물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운전면허가 없었다. 내 나이 18살이었다.
J의 누나가 나를 찾아왔다. J가 학교를 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함께 가출을 했는데 혼자만 학교에 나갈 수 없어한다고 했다.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녀는 말했다. 고3, 2학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형님들에게 졸업하러 간다고 했다. 영화에서 보면 그런 조직에서 나오기가 쉽지 않았는데 형님들은 흔쾌히 어서 가라고 내게 돈까지 쥐여줬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다시 오라는 말을 남기며. 나는 그 길로 다시 서울로 왔다. 1등급이었던 내신은 3등급으로 떨어졌지만 무사히 졸업은 할 수 있었다. 근 4개월 정도를 무단결석했다. 나는 하루 결석했을 때 받는 정근상을 탔다. 학부모가 학교를 방문하면 선생님은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던 때였다. 서랍에 봉투가 담기면 그제야 서랍 열기를 멈추는. 그런 시절도 있었다. 씁쓸하지만 말이다.
선생님으로부터 '너만 공부 못해라' 저주를 받던 녀석은 고등학교 졸업장으로도 대기업 본사에 취직했다. 나는 재수를 하고 다음 해에 건축공학도가 되었다. 가끔 형들과 연락을 한다. 그들은 한번 놀러 오라. 너한테 좋은 인생 경험이 될 거다. 다시 여기서 일할 생각은 마라! 등의 덕담을 건넨다. 그들도 내가 그들의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걸 진작에 안거다. 그럼에도 따듯하게 대해준 점에 뒤늦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친구'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니까 조금 과장된 것이 있겠다. 현실의 모습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영화와 현실 그 사이쯤에 내 폭풍 같은 고3 시절이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에 흐릿해진 상처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기억이지만 가끔은 그때가 그립다. 거칠었지만 순진하기도 했던 그 시절이.
덧붙이는 말.
극의 구성과 재미를 위해 약간의 각색이 있음을 고백함.
글쓴이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