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쓰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것이다
첫 아이를 갖고 나서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간 감각을 갖게 되었다. 이전 까지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글을 읽고, 빠르게 타자를 치고, 강의자료를 만들고, 회식을 하며 밤 시간을 보내고. 얼마 자지도 못했는데 다음 날이 다가와 무언가를 해야 하는 그런 시간이 나에겐 익숙했다. 그런데 임신을 하고 나서 하나 둘씩 일과 만남을 놓게 되자 하루가 굉장히 느리고 천천히 가는 것이었다. 일을 하지 않아서 생긴 시간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이를 몸에 품고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어서 천천히 움직이다보니 더 시간은 늘어지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을 거리를 두 시간에 걸쳐서 걷고, 하루면 읽었을 책을 일주일 붙잡고 있어도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해 다 읽지 못했다. 집안 청소도 느릿느릿. 그마저도 잘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세상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나의 능력은 감퇴되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나 혼자 달에 착륙한 우주인이 된 듯 아주 느리게 느리게 발걸음을 떼며 앞으로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생각은 살아있어 수만가지 생각이 팍팍 지나갔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나만 혼자서 이렇게 뒤쳐지면 안 된다. 여러 생각이 마구 머리 속을 때렸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면서 나의 내부에서는 고요히 지진이 일어났고, 조금씩 조금씩 느리게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 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선선한 바람이 환기창을 향해 들어왔고 이런 생각이 툭하고 떨어졌다. ‘시간은 보내는 거였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시간이 지나는 줄 모르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목표니, 시간관리니, 스케쥴이니 하는 것을 알고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눈을 뜨면 움직이고 배고프면 먹고 또 주변에 보이는 것을 만지작 거리다가 또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그러면 하루가 지나 간다. 어제 보다 몸이 조금 더 크고, 어제 할 수 없었던 일을 조금 더 할 수 있게 되고, 가보지 못했던 곳을 탐색하고, 맛보지 못했던 것을 먹게 되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다. 머리가 생기면서 시간표를 그리기 시작했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일정을 짜고, 거기에 나를 맞추는 습관이 당연한 것인듯 여기게 되었다. 시간을 짜임새 있게 조직하고 써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 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교환도 환불도 안 된다. 한 시간 더하기 한 시간은 두 시간이 아니다. 똑같이 공부나 일을 해도 사람마다 그 결과는 정말로 다르다. 어떨 때는 아주 천천히 여유를 부렸지만 잘되서 의외의 것을 얻기도 하고, 어떨 때는 빡빡하게 일한 것을 다 날려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어쨋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습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이 말이 나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생산적으로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서 말이다. 동시에 임신으로 인해 빨리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조급하게 생각지 않게 되었다. 아이를 가졌을 때는 그 아이를 품고 있는 열 달의 시간을 온전히 ‘보내야’ 하고, 더 빨리도 더 늦어지지도 않는, 딱 맞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냥 시간을 흘려 보내기로 했다.
내 딸 이름이 ‘시우’다. ‘때에 맞게 내리는 비’라는 뜻이다. 나에게 시간이란 그런 것임을 깨닫게 해 준 장본인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