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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Apr 19. 2020

아줌마들의 온라인 회식

3개월 가까이 일이 거의 없다. 드문드문 진행되던 외부 활동은 코로나의 확산과 함께 중단되었다.


집 안에서만 지내던 지루한 시간이 지나가고 다음 달부터는 화상 회의 형식으로 슬슬 업무가 시작되는 분위기이다. 고객을 대면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미팅을 한다니. 함께 일하는 지인과 일대일로 줌(zoom)을 켜놓고 이게 과연 가능한 거냐 낄낄거리며 산만한 화상 회의 실습을 해보기도 했다.


이후에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설명회나 강의에 몇 번 참여할 기회가 생겼고, 화상 회의의 진행 방식이나 분위기가 꽤 익숙해졌다. 문득, 얼굴 본 지 오래된 동네 엄마들을 온라인으로 모아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몇 달째 수다를 못 떨어 입이 근질거리는데 화면으로라도 만나면 답답함이 조금 해소될 것 같았다.


대뜸 회의를 예약하고 채팅방에 공지를 돌렸다. 신문물을 접한 엄마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한 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드디어 미팅이 예정된 날. 아줌마들이 한 명씩 입장하며 '금요일 밤의 온라인 회식'이 시작됐다. 접속하는 스타일에서부터 각자 개성이 강하게 느껴졌다.


1. 준비성이 철저한 시청 주무관 엄마가 미팅이 시작하기도 전에 1번으로 입장을 한다. 앱 설치하고 오디오 비디오 체크할 것을 감안해서 한 시간 전에 책상 앞에 앉아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이크에 이상이 있어 시간이 걸렸지만 일찌감치 접속한 탓에 시작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2. 불금이면 술 약속으로 바쁜 엄마가 예상외로 2번으로 입장한다. 이미 일차를 끝내고 집에 들어왔다고 했다. 취중에도 모임 약속을 잊지 않은 것이 대견하다. 아마 온라인 모임이 끝나면 또다시 한 잔 하러 나갈 것이다.


3. 막 퇴근하고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면서 3번 엄마가 입장한다. 택배가 왔다며 상자를 격렬하게 뜯어 내용물을 꺼내는 모습이 카메라를 통해 실감나게 전달된다. 아이스박스에서 김치를 꺼내는 것 같다. 식사하고 다시 들어오시라고 내보낸다.


4. 이어서, 야근을 마치고 퇴근 중이던 4번 워킹맘이 이어폰을 끼고 지하철 안에서 접속했다. 옆에 서 있던 동료 직원도 같이 인사한다. 지하철이니까 조용히 듣고만 있으라고 하는데도 자꾸 말을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이상하게 쳐다본단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5. 온라인 회식이니 각자 맥주 한 잔 씩 들고 접속하는 걸로 사전에 안내를 했다. 술을 못 마시는 우리 5번 엄마는 음료 없이 육포를 들고 나타나서 뜯어먹는데 마이크 성능이 좋아서 소리가 아주 리얼하다. 난데없는 먹방을 여기서 시청하게 된.


6. 이 와중에 늘 명석하고 똑 부러지는 6번 엄마가 접속이 안된다고 민원을 제기한다. 비번도 없고 참석자 제한도 없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어쨌든 여러 번 시도한 끝에 힘들게 입장에 성공한다. 불 꺼진 방에서 접속을 하는 바람에 회색 얼굴이 화면에 갑자기 나타나서 다들 깜짝 놀랐다.


7. 가장 걱정했던 왕언니 7번 엄마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아한 모습으로 입장한다. 카메라의 거리도, 조명도 적당하고 뒷 배경의 장식장까지 완벽한 것이 유튜버 못지않다. 딸내미와 함께 앉아 있는 걸 보니 딸내미 찬스를 쓰셨나 보다.


8. 마지막으로 저녁 준비하느라 조금 늦을 거라고 말했던 8번 엄마까지 들어왔다. 화사한 얼굴을 보니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들어오신 것 같다.


입장과 함께 봇물 터지듯 대화가 시작된다. 배수구에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주방이 물바다가 된 이야기, 재수 생 딸에게 새벽밥 지어주는 이야기,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이 온라인 수업 시간에 꼼수 쓰는 이야기, 동네 정육점에서 재난지원금을 쓸 수 없다는 이야기... 늘 그렇듯 아줌마들의 수다는 주제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동안 얘기하지 못했던 근황을 전하느라 오디오가 끊이지 않는다.


한 동네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이어서 화면에 보이는 배경도 익숙하다. 지금 있는 곳이 안방인지, 거실인지, 주방인지 딱 보면 위치가 대충 파악이 된다. 각자 가장 편한 공간을 찾아 식탁에 앉기도 하고, 안마 의자에 눕기도 하고, 화장대 의자나 소파에 앉아서 새로운 스타일의 회식을 즐겼다.


이제껏 강의를 듣거나 미팅하는 용도로는 화상 회의를 경험해봤지만, 순수하게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온라인 모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녹화된 영상을 다시 보면서 느낀 점을 정리해본다.


첫 번째는, 온라인으로 모임을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모임에 빠지던 사람들이 할 말이 없겠다는 것. 프로 불참러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구실들이 온라인에서는 공감을 얻기 힘들 것이다. 휴대폰을 들고 있기만 하면 어떤 장소에 있던 얼굴은 보여줄 수 있으니까.


두 번째, 오프라인에서는 인원이 많을 때 자연스럽게 소그룹으로 나뉘어 수다를 떨기도 하는데, 온라인에서는 오로지 이야기하는 한 사람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발언 시간이 너무 길거나 나에게 관심 없는 주제로 대화가 오래 진행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피로감이 느껴진다. 온라인 모임에서 참여도를 높이려면 사람마다 발언 시간을 적당히 배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은 각도의 중요성. 내 얼굴에 최적화된 카메라의 각도와 방향을 찾아야 한다. 카메라를 아래에 두었더니 나의 화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콧구멍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영상을 보며 깨달았다.


온라인 특강의 경우 모임이 종료되면 단톡방에 소감이 하나씩 올라온다. 누구는 오늘 어땠다, 어떤 부분이 도움이 되었다, 하는 훈훈한 후기과 덕담으로 채팅창이 복닥거린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줌마들의 회식은 드라마 '더 킹'의 시작 시간인 10시에 맞춰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더 킹이 끝나면 '부부의 세계'도 봐야 하는 날이다. 줌 화면이 종료되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각자 흩어졌고 단톡방은 오랫동안 고요했다. 짧게 만나 강렬하게 대화하고 다음 스케줄로 이동하는 효율적인 온라인 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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