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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Nov 14. 2020

책 읽어주는 남자 - 베른하르트 슐링크

아픈 소년이 길에서 여인의 도움을 받게 되고 소년은 그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소년은 가족과 친구들 몰래 매일 여인의 집에 찾아가 사랑을 나누고 여인의 부탁으로 책을 읽어준다.


엄마뻘인 한나와 비밀스러운 연애를 지속하며 미하엘은 조숙한 청소년 시기를 보낸다. 한나와의 관계로 심신의 안정을 얻고 학업과 교우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지만, 이른 시기에 경험한 비정상적 연애 경험은 이후 성인이 된 미하엘의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준다. 10대 소년에게 벅차고 뜨거운 사랑을 가르쳐준 한나는 어느 날 홀연히 미하엘을 떠나고 둘의 관계는 허탈하게 끝이 난다.


대학생 미하엘은 세미나를 위해 참관한 강제수용소 재판에서 우연히 한나를 발견한다. 이 곳에서 한나가 전쟁 중 나치의 일원으로 포로를 감시했고, 수감된 포로들이 화재로 몰살당한 사건의 피고인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범자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가진 전후 세대인 미하엘은 한나의 죄와 개인적인 감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문맹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미하엘을 떠났고, 이제는 자처하여 죄를 뒤집어쓰려는 한나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그녀를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다.


도움을 청하는 미하엘에게 아버지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떠나 그 사람이 어른이라면 판단할 자유를 인정해야 하며, 옆에서 간섭하여 그 사람의 품위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전쟁 중의 범죄에 침묵한다는 이유로 부모 세대를 부끄럽게 여기던 미하엘은 고민 끝에 한나의 문제에 대해 아버지의 의견을 따른다.


수감된 한나에게 책을 읽어 보내면서도, 그녀가 뒤늦게 글을 깨우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나의 모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미하엘은 한나를 찾지 않는다. 출소를 앞둔 한나를 만나 그동안의 죄책감으로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미하엘에게 한나는 실망한다. 한나가 죽은 뒤 미하엘은 수감 생활 동안 한나가 책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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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가진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빨아들이듯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미하엘이 한나의 집에서 목욕을 하고 책을 읽어주고 사랑을 나누는 장면의 묘사는 생생하고 감각적이어서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 실제로 겪은 사건일 것이라고 함부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욕조에 목욕물을 받는 풍경, 집 밖에서 들려오는 가구 공장의 시끄러운 소리, 차표 검수를 마치고 돌아온 한나에게서 느껴지는 일터의 냄새까지, 섬세한 표현으로 인해 책 속의 장면이 영화처럼 그려진다.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을 곧잘 만들었던 한나의 행동은 글을 읽지 못하는 어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하나씩 이해할 수 있었다. 수치심은 젊은 시절의 한나와 나이 든 한나를 수시로 궁지에 몰면서 불리한 상황을 만들었던 감정이다. 이와 비슷하게 미하엘을 괴롭히는 감정은 죄책감이다. 서운함으로 한나를 외면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전범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으며,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 한나로부터 거리를 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초반의 행복한 연애 시절과 대비되면서 불행과 비극이 극대화되는 느낌이었다.


가장 오래 생각이 머물렀던 부분은 아버지와 미하엘의 짧은 대화였다. 인간의 ‘자유와 품위’는 인간에 대한 엄격한 존중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도덕적 문제를 연구한 학자이고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했던 아버지 역시 품위로 포장된 침묵에 동조하는 기성세대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품위를 지켜준다는 말은 '내가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안온함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수치심을 가지고 위장하는 삶을 살았던 한나도, 그런 여자의 품위를 지켜주었던 미하엘도 안온하거나 행복할 수는 없었다.


이 책이 가지는 로맨스 소설 이상의 시대적인 무게감을 고려했을 때, 한나의 죽음은 글을 깨우친 후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의 기록과 나치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으며 본인의 행동이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였음을 뉘우친 결과였을 것이라고 나름의 해석을 더해본다. 원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고뇌하는 미하엘의 인간적인 모습, 한나와의 재회, 문맹을 탈피하며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는 한나의 변화까지 한 편의 수수께끼를 추리하며 따라온 기분이다. 남녀의 사랑과 개인이 가지는 콤플렉스와 전후 세대의 고민이라는 여러 가지 주제를 넘나들며 재독할 때마다 다른 관점을 만들어준 가볍지 않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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