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업무 중 가장 힘들었던 동영상 강의 제작이 끝났다. 처음 해보는 일이 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스트레스의 강도가 컸던지 일이 끝났는데도 며칠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집에서 폐인처럼 지냈다.
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강사라는 직업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말주변이 없고 말을 많이 하면 쉽게 피로해지는 스타일인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말주변이 없으니 자발적으로 나서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이나 발표를 하는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여러 명이 모인 미팅에서는 이슈가 없다면 발언을 많이 하지 않는다. 지인들과의 모임에서도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쪽에 속한다. 그 외에도 강사와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어쨌거나 '일'이므로 개인적인 성향을 따질 여유가 없다.
다행히 내게 주어진 강의는 이미 익숙한 분야의 매뉴얼을 알려주는 성격의 교육이어서, 내용을 쉽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강의에 녹아 있으면 참석자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워했다. '어려운 개념이나 툴 사용법을 내가 먼저 학습한 뒤 이 분야의 초심자들에게 하나씩 소개해 준다'는 마음을 먹으면 의외로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올해 들어 사람들이 강의장에 모일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학교가 그렇듯 기업 강의도 대부분 비대면 강의로 전환되었다. 교육생들 입장에서는 강의장까지 이동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고, 기업은 온라인 강의로 콘텐츠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으니 환영하는 분위기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상황에 빠르게 적응을 하고 있다.
교육생들과 아이컨택을 하고 표정을 보면서 강의하다가 상황이 바뀌어 카메라와 조명 아래에서 혼자 연기하듯 말하는 것은 매번 어색했다.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시선은 불안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없으니 준비한 내용을 책 읽듯 줄줄 읊었다. 설명 중에 말 한마디 얹으려고 하다가도 영상 콘텐츠에 애드리브를 섞거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머뭇거렸다. 편하게 평소처럼 하시라고 말하는 스텝들 앞에서 나 혼자 불편하고 나 혼자 부담스러워 녹화 때마다 긴장을 했고 몇 번의 엔지 끝에 부자연스러운 강의 영상 몇 편이 제작됐다.
촬영이 끝나고 녹화된 강의를 내가 모니터 하는 일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색해하는 표정의 나를 내가 바라본다.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할 때의 표정, 자신감 없는 말투, 입술에 힘을 주는 습관까지. 모른 척하고 싶었던 사소한 모습에 눈이 가서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나 혼자만 보고 지워버리고 싶은 영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시청할 일을 생각하니 깊은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영상을 업로드하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강의가 업로드되니 사람들이 동영상에 댓글로 질문을 하고 좋아요를 누르기 시작한다. 이름도 얼굴도 보이지 않는 점을 이용해 마음 놓고 무례하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강사들 간의 콘텐츠 조회수와 좋아요 반응은 비교의 척도가 된다. 나를 드러내는 것에 스스럼없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는 이 상황은 나에게는 예전에 없던 스트레스를 만들었다.
동영상을 찍어 공유하는 것이 흔해진 요즘, 본인이 직접 콘텐츠를 만들고 진행까지 하는 재미있는 유튜브 채널이 많다. 굳이 인터넷에서 찾을 필요도 없이 내 주변을 봐도 어제 본 드라마 얘기, 며칠 전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본래 내용보다 맛깔나게 전달하는 사람들이 있다. 듣는 이가 몰입하게 만드는 달변의 재능은 흉내 낸다고 해서 같아질 수 없는 부럽고 존경스러운 능력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예전에는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어울려 점집을 찾았었다. 터놓는 이야기는 당연히 회사에 대한 고민. 때려치울까요, 다른 일을 할까요,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았다. '대안이 없으면 버티세요.'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힘들어도 꾹 참고 버티다 보면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먼저 회사를 떠나기도 했고, 조직이 바뀌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어찌 됐건 일을 계속 붙잡고 있어야 이직의 기회도 왔다. 답이 정해져 있는 고민을 질문하는 순진한 직장인들에게 점쟁이는 누구나 해줄 수 있는 대답을 해주었고, 우리는 말을 쏟아낸 것에 후련해하며 다시 전쟁터 같은 회사로 돌아왔다.
올 한 해 동안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수십 번 했던 것 같다. 녹화 날짜가 가까워질 때마다 목을 조여 오는 스트레스, 왜 이렇게밖에 못할까 하는 자괴감, 이제 일할만큼 했다는 자기 합리화가 서로 날뛰었다. 그러면서도 대안이 없으면 버티는 게 답이라는 것을 알기에 꾸역꾸역 연말까지 견디며 한 고비를 넘었다. 작은 성취감과 통장에 들어온 노동의 대가가 나를 위로해준다.
여기가 한계라는 생각이 들 때 빠져나가는 멘탈을 붙잡고 어떻게든 주어진 일을 끝내면 그것이 다시 새로운 기회로 이어지곤 했다. 처음 맡아보는 마케팅 업무에 이리저리 치이며 너덜너덜해져도 그 경력을 바탕으로 다음에는 다른 회사에 마케터로 지원할 수 있었다. 강의가 처음이라 썩 잘하지는 못해도 좌충우돌 진행하다 보면 그다음부터 다른 기업에서 강의 제안이 들어왔다. 올해는 어설프고 부족한 온라인 강의를 몇 편 찍었지만 이 경험으로 생각지 못한 기회가 생길지 누가 알까.
일이라는 것은 길고 긴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잠시 편해졌다 싶으면 또다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과정의 반복이다. 가사도 육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모든 노동은 생명을 조금씩 갈아 넣으며 경험과 인내를 키우는 훈련인 것 같다. 평생 나를 울고 웃게 만든 노동과 이별하는 날 아주 쿨하게 보내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