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 "스탭입니다."

아찔했던 첫 현장의 기억

by 아티


학교에서는 각 학년마다 프로젝트가 정해져 있었다. 보통 1학년은 5분 정도의 짧은 길이의 단편, 2학년은 5~15분 사이, 3-4학년은 자유롭게 하되 1년 동안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처음 1학년 때는 선배들 프로젝트에 막내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선배들의 작품에 참여하면서 각 파트별끼리 친해지기도 하고, 일 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렇게 내가 처음 참여하게 된 영화는 한 3학년 선배의 작품이었다. 나는 연출 전공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연출부 막내로 참여하게 되었다. 연출부는 보통 '연출(감독)-조연출(조감독)-스크립터-슬레이터'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 이걸 기준으로 해서 제작 규모가 커지면 추가적으로 인원이 더 많아지거나 다른 역할들이 추가된다. 그중에서 내가 맡은 부분은 스크립터였다. 스크립터는 영화의 컷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모니터에 있는 모든 장면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이 컷이 OK 인지 NG 인지도 적고, 연출과 함께 모니터를 보면서 대화를 가장 많이 하는 포지션이다.



처음 맡게 된 스크립터는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일단 현장에서 내가 무엇을 중점적으로 봐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러다 보니 오로지 비어있는 스크립용지를 가득 채우는 것이 내 목표였다. 그렇게 촬영 2회 차가 되는 날 문제가 생겼다. 아직 감독님은 안온 상황이었지만 나는 이미 현장에 도착한 상태였고 연출 소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해진 마음 때문에 가져온 짐들을 열심히 뒤져보았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멘탈붕괴가 되어버린 나는 손을 벌벌 떨며 감독님께 전화를 걸었다.


"저.. 감독님.. 제가 소품을 놓고 왔는데 어쩌죠..? 지금이라도 찾으러 다녀올까요?"


그 당시에 감독님은 나보다 네 학번이나 높은 선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건 아니지만, 신입생이던 시절을 생각하면 고학번 선배였으니 충분히 무서울만했다. 당연히 혼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선배의 반응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온갖 욕설이 난무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말은 "너 내 영화 망치러 온 거지?"라는 말이었다. 수많은 욕을 들었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그 말을 듣자마자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고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한참을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여러 번이나 세수를 했지만 눈이 충혈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감독님보다 더 윗 선배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내게 자꾸 말을 걸었다. 나는 괜히 더 높은 선배들이 감독님을 혼내고 감독님이 나를 또 혼내는 상황이 생길까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멈추고 나니 이 상황을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가득 찼다. 그랬더니 상처받은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일단 가져온 짐들을 하나하나 다시 빠짐없이 찾아보기로 했다. 마음이 급해서 내가 놓친 부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먄약 없다면, 촬영 시작 전까지 다시 만들어 올 참 이었다. 나는 차근차근 짐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웬걸, 다른 소품들 사이에 내가 찾던 소품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소품을 찾은 후에 다행히 촬영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 선배는 갑자기 다가와서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대했다. 솔직히 상처받은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애써 웃어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감독 선배가 다른 선배들에게 혼이 났다고 했다. 촬영장에 2시간이나 지각했는데 그 이유가 술을 마셔서 그런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내게 화를 냈던 것도 단순히 술주정이었겠거니 하면서 오히려 진심이 아니었던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 후, 광고 현장에서 조감독으로 일을 할 때였다. 우연히 선배가 스태프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현장에서 마주쳤다. 그제야 나는 넌지시 선배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표현했고, 선배 역시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그 당시 일은 내게 책임감의 무게에 대해서 처음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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