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모습
걷기를 좋아한 건 몇 년 됐고,
자주 걷게 된 것은 일 년이 넘었고,
매일 걷기를 시작한 것은 116일이 되었다.
매일 걸으면, 조금씩 천천히 변하는 자연을 못 느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어제와 다른 (사소한) 변화가 눈에 더 잘 보인다.
여름에서 가을로 변할까 말까 하는 요즘 계절엔 칡꽃이 눈에 띈다. 자주색 꽃들이 꼬깔콘 모양으로 붙어서 피어나는데, 칡꽃을 보고서야 칡덩굴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내게는 꽃의 존재감이 식물의 존재감보다 크다.
칡은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가며 자라고, 칡이 감은 식물은 죽는다고 들었다. 칡꽃이 너무 많이 눈에 띄는데 그래도... 괜찮은 거겠지?
나는 한여름 화사하게 피어나는 배롱나무의 꽃을 수국과 동백 다음으로 좋아하는데 꽃에도 작황이 있는지 올해의 배롱꽃은 이 나무도 저나무도 탐스럽지가 않았다.
배롱나무의 꽃들이 지고 있다. 여름이 시작된 지 어느새 백일이 다 되어가나 보다.
초록색과 보라색, 자주색과 청색이 묘하게 섞인 영롱한 열매를 발견했다. 신비로운 빛깔이 정말 아름답고 오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열매의 이름이 개머루라는 걸 오늘 알았다. 이렇게 예쁜 열매한테 개머루라니... 개살구처럼 못 먹는 거라 개가 붙은 머루인 걸까. 팅커벨 재질의 예쁜 꽃잎을 가진 꽃이름이 닭오줌풀꽃, 계요등이라 그래서 으잉 했는데, 이 개머루 또한 반전이었다.
오다가다 만나는 야생풀들의 반전 이름들은 매일 걷는 산책길의 또 다른 재미이다.
초록잎에 빨간 열매의 모습이 익숙한 먼나무는 지금 초록잎에 초록열매를 가졌다. 늘 빨간 열매가 달린 모습을 보고서야 먼나무라는 걸 알아차린 탓인지 먼나무에 초록 열매가 달린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한겨울에 초록잎에 빨간 열매를 달고 하얀 눈을 맞으며 서 있을 먼나무가 기대된다.
참 오늘 노란빛이 돌기 시작하는 감귤을 봤다.
얼마 전까지 단단한 쌩초록 빛이던 귤이 나긋나긋 노란빛이 돈다. 곧 귤의 계절이 오려나 마음이 들뜨다가 벌써 또 겨울이라고? 가을도 못 보고 겨울이 올 것 같은 조바심과 귤맛을 기다리는 설렘이 충돌한다. 계절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기억과 다른 계절의 변화라면, 벚나무의 애벌레의 등장시기이다. 해마다 벚꽃이 지고 한창 벚나무에 초록잎이 돋아난 후인 봄과 여름사이에 애벌레가 생겼었는데, 올해는 여름이 한풀 꺾이는가 싶은 이 계절에 엄청난 애벌레가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주까지는 애벌레 때문에 벚나무 아래를 지나기가 소름 끼칠 정도였다가 이번주엔 애벌레가 안 보여 경계심 없이 벚나무길을 지날 수 있게 되었다. 한 계절을 건너뛴 건지 초여름에도 등장하고 늦여름에 재등장한 건지 잘 모르겠다. 더 유심히 기억하고 눈치챘어야 했나 보다. 평소보다 늦게 애벌레를 만난 벚나무의 잎이 이른 시기에 벌써 지기 시작했다. 대신 덜 노랗고 덜 빨간 낙엽이다. 내가 알아차리는 가을 신호는 벚나무에 낙엽이 지는 것이니 내 기준으로는 이제부터 가을이다.
처서가 지나고도 맹렬하게 뜨겁던 태양이 마침 어제의 폭우를 기점으로 사그라든 것 같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도 시간이 흐르면 끝나긴 하는구나. 설마 속았지 하고 쨍하고 다시 뜨겁게 내리쬐는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그 많던 벚나무 애벌레들은 어디 가서 무엇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