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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썽 Oct 30. 2023

등산을 무드 있게

유유자적. 한라산으로 산책가기

동네 둘레길을 매일 걷는 일은 지루할 줄 알았으나, 매일 다르게 변하는 길을 느끼면서 걷는지라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다. 같은 길이지만 매일 새로운 벌레를 만나고 매일 새로운 풀을 발견하고, 알던 풀들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걸 지켜보는 게 꽤 즐겁다. 그렇게 매일 즐겁게 둘레길을 걷지만, 가끔은 다른 길도 필요하긴 하다. 매일 밥만 먹을 수는 없는 것. 가끔은 김밥도 먹고 싶고, 치킨도 먹고 싶은 것처럼 다른 길도 걷고 싶다.


걷기 친구의 제안으로 한라산 관음사 탐방로를 걸었다.


등산이라 할 수 없는 우리의 등산. 그러나 등산이 아닌 것도 아닌 등산.


왜 산은 다 올라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이렇게 반만 올라도 되는 거였는데..... 백록담 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기에 처음부터 여유 있게 부담 없이 출발할 수 있었다.

정상이 목표였다면, 남들처럼 전투적이고 꼼꼼한 장비와 비장한 각오가 필요했을 것이다


동네 산책 가는 마음과 물 한 병만 챙겨 들고, 정상을 오를 사람들은 다 지나간 텅 빈 탐방로를 걷는 기분이 유유자적 자체로 느껴져서 행복감이 크게 느껴졌을까. 가을빛 속 산이 조용한 클래식을 노래하는 것처럼 은은해서 기분이 좋았을까.  남는 게 시간뿐인 날에 꽤 익숙해졌음에도 한적한 산속을 여유 있게 걷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목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게 왜 낯설면서도 뿌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왜 좋은 걸까.


이루지 않아도 되는 것들. 꼭 그럴 필요는 없는 것들. 그래도 되는 것들.


물론 언젠가, 조만간에 정상을 보러 갈 것이다.

정상을 목표로, 정상을 향해 걷고, 마침내 백록담을 내 눈으로 직접 보는 날 성취감으로 가득 찰 행복은 오늘 반만 오른 산에서 느낀 여유와 행복보다 스무 배쯤 더 짜릿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득 차오르는 행복감이다.

다만 오늘, 반만 오른 산에서도 충분히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부터 목표가 정상이었다면 실패한 산행이겠지만, 갈 수 있는 만큼, 가고 싶은 만큼만  목표로 정하고(목표점은 정해져 있었다)출발한 산책길이라 한라산으로 산책 갈 수 있는 우리의 여유가 오늘 행복감의 이유이지 싶다. 매일 걸으면서 체력이 쌓였고, 체력에 쌓인 자신감 덕분에 한라산을 산책할 수 있다는, 마음에도 행복이 쌓인다. 이런저런 이유로 걷는 일에 더 진심이 담기고 있다.


가을이라 하늘은 파랗고, 여름처럼 뜨거운 날씨 탓에 구름은 하얗고, 육지에 비하면 한라산 단풍은 시시한 편에 속하지만, 노랗고 빨간 생기 가득한 나뭇잎들이 햇빛 속에 별처럼 빛나고,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낙엽비가 아름다웠다. 까만 현무암 위에 생긴 물웅덩이는 반짝이는 거울이 되어 하늘도 비추고, 나뭇잎도 비추고, 가을을 가득 담고 있다.  빛의 속도처럼 빠르게 가을이 지나갈까 봐 잔뜩 겁먹었던 나는 가을을 더 보고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걸을수록 걷는 일이 정말 행복하고,
매일 걷는 일로, 몸과 마음의 건강을 다지고, 그날의 행복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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