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매력은 질문을 던지고 틀을 부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패션은 이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사치, 낭비, 오염 등 꼬리표를 줄줄이 달고 있는 죄 많은 분야라 더욱 그렇다. 돈 많은 럭셔리 브랜드라면 더더욱 그렇다. 럭셔리 브랜드의 중요한 의의는 예술적 접근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디올은 ‘여성스러운(feminine)’ 브랜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발전되어 오면서, '여성성'에 대해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여성스럽다'라는 표현이 과연 섬세하고, 얌전하고, 우아하다 등등의 형용사가 따라붙어야만 하는가. 즉, '여성성'과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조명하고 이에 대한 다양하고 포용적인 정의가 필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미닌 브랜드로 유명한 디올의 ‘여성스러움’은 무엇일까. 디올은 ‘여성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크리스찬 디올 - 아름답고 수동적인 여성
20세기 초,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졌다. 많은 남성이 전쟁에 징집되었고, 여성은 텅 빈 노동현장을 채웠다. 사무직은 물론, 이전에는 남성들만의 영역이었던 공장과 농촌까지도 여성이 빈 자리를 채웠다. 인간성을 가장 배반하는 행위인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활동 영역을 넓히고 목소리를 키울 수 있었던 계기였다. 따라서 여성복도 실용성이 강조되고 활동이 편안한 스타일이 등장했다. 특히 샤넬(Chanel)의 디자인이 한몫했다. 샤넬은 저지 드레스, 와이드 팬츠, 그리고 그 유명한 샤넬 수트를 발표하며 코르셋을 벗어던졌다. 샤넬은 활동성과 실용성을 매우 중시했고, 그 철학은 그의 작품에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이후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이 등장한다. 크리스찬 디올이 활동한 시기는 샤넬보다 늦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이었다. 디올의 첫 컬렉션은 1947년에 발표되었다. 샤넬이 단순한 선으로 편안함을 추구했던 데에 반해, 디올은 다시 허리를 조였고, 날씬한 팔다리를 강조했으며, 엉덩이를 풍만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디올의 시그니처 스타일 ‘뉴룩(New Look)’이다.
왼쪽: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 (출처: American Vogue 1926) / 오른쪽: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Dior 1947 SS 오뜨꾸뛰르) (출처: Vogue)
뉴룩에서 드러나는 디올의 시각은 다소 불편하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디올은 여성의 편안함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금 강조된 가녀린 허리와 풍성한 치마는 일상생활에서 매우 큰 불편함을 초래했다. 칼라(collar)는 늘어지기 쉬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치마는 풍성함을 표현하기 위해 12m의 천이 사용됐다. 디올에게 여성의 패션이란 기능 따위 없는 장식적 요소일 뿐이었다. 마치 뉴룩은 전쟁 동안 나라와 가계의 노동을 도맡았던 여성에게 ‘이제 원래의 너희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여성에게 옷이란 활동복이 아닌 장식이라는 그의 대사와 일치한다.
“남자의 주머니는 실용을 위해, 여자의 주머니는 장식을 위해 존재한다.”- 크리스찬 디올
두 번째, 디올은 철저히 중년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바라보았다. 뉴룩은 여성의 신체를 기이할 정도로 왜곡했던 코르셋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게피에르(guepire)’, ‘웨이스피(waspie)’와 같은 속옷으로 허리를 조이고 착용했다고 한다. 치마 또한 여러 층의 천과 페티코트로 풍성한 형태를 유지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뉴룩은 여성의 실제 신체보다 가슴과 엉덩이를 부각한 인위적인 형태를 조성한다. 실제 여성의 다양한 모습이 아닌, 사회적으로 규정된 이상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며 여성을 우아하고 가녀린 존재로 정의한다. 그리고 여성이라면 이와 같은 모습을 지녀야 한다는 함의를 풍긴다. 이제 막 활동성을 표출하던 여성성은 다시 사회적 시선이 강요한 신체적 조건에 종속되었다. 특히, 디올은 뉴룩을 통해 ‘꽃과 같은 여성스러움’을 강조했으며, 여성을 나약하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한정했다.
“1946년 12월에는 전쟁과 제복의 후유증으로 여성들은 여전히 여전사 같은 모습에 여전사처럼 옷을 입었다. 그래서 나는 어깨는 둥글고, 풍만하고, 여성스러운 가슴, 활짝 펼쳐진 스커트 위로 한 뼘 정도의 허리를 한 꽃처럼 아름다운 여성들을 위한 옷을 디자인했다.”- 크리스찬 디올
왼쪽: 크리스찬 디올 1953 SS 튤립 드레스 / 오른쪽: 크리스찬 디올 1951 FW (출처: Summer Lin)
사실 디올은 후반으로 갈수록 자연스러운 곡선을 추구한 담백한 디자인도 많이 발표했다. 하지만 결국 디올의 상징으로 남은 건 뉴룩의 모래시계 라인이다. 디올을 거쳐간 후대의 많은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뉴룩을 제시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어쩌면 디올의 뉴룩은 디올의 한계를 설정하는 가장 단단한 새장일 수도 있다.
존 갈리아노 - 섹시하고 능동적인 여성
“내가 세운 목표는 아주 단순하다. 어떤 남자가 내가 만든 드레스를 입은 여성을 쳐다보며 속으로 ‘저 여자와 섹스를 해야겠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생략) 나는 그저 모든 여성이 욕망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 존 갈리아노(Alison, 92)
좀 더 가까운 과거로 돌아와보자. 디올의 다섯 번째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다. 1996년부터 2011년까지 디올의 디자이너를 맡았다. 위 충격적인 발언에서 알 수 있듯, 갈리아노의 디올 작품에서 여성성이란 성적 매력이다.
1) 실루엣의 강조
디올 이후의 디자이너 중 ‘뉴룩’의 곡선을 가장 과장하고 강조하는 데 집중한 디자이너다. 여성의 신체 중에서 가장 성적인 매력이 높은 부분으로 여겨지는 가슴과 엉덩이를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허리도 잘록하게 조여서 곡선의 대비를 심화시켰다.
왼쪽: 크리스찬 디올 2004 FW 오뜨꾸뛰르 / 오른쪽: 크리스찬 디올 2008 FW 오뜨꾸뛰르 (출처: Vogue)
2) 시스루와 노출
갈리아노의 디올 작품 중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눈에 띄게 노출한 작품이 보인다. 특히, 시스루 룩을 통해 보일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하며 에로틱한 분위기를 가미한다. 이러한 작품에서 여성의 몸은 성적인 매력만 지나치게 부각된다.
왼쪽: 크리스찬 디올 2000 FW 레디투웨어 / 오른쪽: 크리스찬 디올 2005 FW 오뜨꾸뛰르 (출처: Vogue)
3) 페티시
아래 사진 중 왼쪽 2003년 가을 레디 투 웨어 컬렉션에서 갈리아노는 대놓고 ‘섹스 로봇’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노골적으로 파이고 달라붙는 실루엣과, 아일렛을 활용한 과장된 끈 디테일이 성적 페티시즘을 내포한다. 오른쪽 2009년 가을 꾸뛰르 컬렉션 사진에서는 ‘가터벨트’라는 스타킹을 고정하는 속옷이 등장한다. 즉, 여성의 속옷을 상징하는 디테일을 활용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여성의 속옷을 눈에 띄게 드러냄으로써 성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
왼쪽: 크리스찬 디올 2003 FW 레디투웨어 / 오른쪽: 크리스찬 디올 2009 FW 오뜨꾸뛰르 (출처: Vogue)
태도의 측면에서 본다면 갈리아노의 디올은 주체적이다. 수동적이지 않고 성적 욕망에 대해 당당한 모습이다. 오히려 일부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신체를 드러내고 자신을 내세우는 모습 같기도 하다. ‘꽃’처럼 우아하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정의했던 크리스찬 디올과 달리, 갈리아노는 관능적이지만 능동적인 모습으로 정의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리아노의 디올은 여성성을 에로틱한 매력으로만 정의했다는 것에 아주 큰 한계가 있다. 갈리아노가 정의한 여성은 태도는 당당할지 몰라도, 노출이 가득하고 페티시를 잔뜩 표현한 모습은 남성적 시선이 강하게 묻어난다. 자신의 성적 욕구에 솔직한 모습보다는 타인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한 모습에 가깝고 그 자체로 ‘성적 대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에밀리는 나체의 여성이 남성들의 사이로 당당히 걸어가는 광고를 보고 성차별적이라고 지적한다. 광고주는 섹시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당당한 순간이라고 옹호하지만, 이는 남성의 시각에서만 이상적인 모습이며 여성의 몸을 대상화한 것뿐이다. 갈리아노의 디올 또한 그렇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 경계를 확장하는 여성
현재로 돌아와보자. 70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디자이너가 디올을 맡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도 한층 발전해왔다. 현재 디올의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Maria Grazia Chiuri)는 디올을, 그리고 여성성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치우리는 디올의 데뷔 무대에 명료한 메시지 하나를 띄웠다. “We should all be feminist(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디올과 함께하는 첫 시작부터 자신의 방향성을 명시했다. 치우리는 이제부터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디올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크리스찬 디올 2017 SS 레디투웨어 (출처: Vogue)
1) 실루엣 완화
치우리의 작품에서는 뉴룩과 같이 여성의 곡선과 부드러움, 섬세함 등을 강조하면서도 성적 대상화처럼 느껴지는 시선은 힘이 빠진 느낌을 받는다. 디올과 갈리아노의 문제라면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의 몸매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치우리는 디올이라는 브랜드가 전달하는 이미지를 퇴색시키지 않으면서, 남성의 시각을 배제하는 방향성을 선택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모래시계 라인의 곡선이 완만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왼쪽: 크리스찬 디올 2021 SS 오뜨꾸뛰르 / 오른쪽: 크리스찬 디올 2017 SS 레디투웨어 (출처: Vogue)
2) 실용성 및 활동성 추구
치우리가 처음 데뷔한 무대는 펜싱복에서 영감을 받았다. 가장 처음 등장한 착장부터 스포티한 성격을 제대로 보여준다. 치우리는 스포츠웨어, 스트리트 웨어 등 다양한 스타일과 접목시키며 실용성을 지향했다. 또한 바지의 폭을 넓히고, 활동에 제약이 없는 스타일을 제시하며 입는 사람의 편안함을 고려했다.
크리스찬 디올 2017 SS 레디투웨어 (출처: Vogue) 왼쪽: 크리스찬 디올 2017 FW 레디투웨어 / 오른쪽: 크리스찬 디올 2020 FW 레디투웨어 (출처: Vogue)
3) 남성복 디테일
디올의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남성복 디테일과 함께 제시하면서 디올이 지금까지 주창해온 ‘여성스러운’ 여성성과의 타협점을 형성했다. 넥타이와 수트 자켓을 함께 제시하거나, 승마복 디테일을 뉴룩 실루엣과 연결하는 등 디자인의 폭을 넓혔다. 또한, 어두운 색과 넉넉한 폭의 수트 팬츠를 통해 우아하고 가녀린 모습을 풍기는 분위기를 없애고,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를 묘사하기도 했다.
왼쪽: 크리스찬 디올 2020 FW 레디투웨어 / 오른쪽: 크리스찬 디올 2021 FW 오뜨꾸뛰르 (출처: Vogue) 크리스찬 디올 2021 FW 오뜨꾸뛰르 (출처: Vogue)
치우리는 디올을 맡게 되었을 때, ‘디올은 여성스러운 브랜드잖아.’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치우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치우리는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했던 듯하다. 치우리는 젠더학을 공부한 딸에게 자문을 얻고, 여성주의 이론을 접목시키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 많은 여성 예술가와 협업했고, 여성이 여성을 보는 시선을 담아내기 위해 많은 여성 사진작가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치우리와 딸 레이첼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는데, 레이첼은 원래 패션산업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성격과, 여성의 외모와 신체를 규제하려는 경향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치우리는 딸과 많은 대화를 나눴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항상 그것에 반대할 수만은 없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조금씩 바꾸는 방향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디올의 한계는 분명하다. 뉴룩의 모래시계 라인이 철저한 디올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어서, 브랜드의 전통을 계승해야 하는 럭셔리 브랜드의 특성상 디자이너들은 뉴룩의 구조적인 형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뉴룩은 기본적으로 여성성을 부드러운 섬세함으로 규정하는 기존의 사회적 정의에 찬성하는 형태다. 더 다양한 여성성을 보여주고 가능성을 열어주기엔 뉴룩의 그림자가 짙다. 하지만 어쩌면 디올 자체의 한계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한계일 수 있다. ‘페미닌’ 브랜드라고 불려지는 만큼 기존의 ‘페미닌’한 성격에 갇힐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럭셔리 브랜드도 소비자의 취향에 귀기울일 수밖에 없으니.
하지만 오히려 이 한계를 안고 디올이 이야기할 수 있는 방향성도 분명하다. 중요한 건 고정된 여성성을 탈피하고 그 개념을 확장하는 것이지 지금까지 여성성이라고 규정되어 온 성격을 전부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남성성’으로 규정된 성격만을 긍정적으로 여길 필요도 없고, ‘여성성’으로 규정된 성격을 폄하할 필요도 없다. 젠더의 고정된 정의에는 저항해야 하지만, 기존에 정의된 ‘여성성’까지 송두리째 바꿔야만 할까. 프레임을 거부할 것인가, 확장할 것인가. 치우리는 후자를 선택했다. 치우리는 기존의 ‘여성성’을 아우르면서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고민했다.
이처럼 디올은 여성성의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온 브랜드다. 디올의 디자이너들은 각자의 대답을 내어놨다. 이런 디올의 흐름을 보며, 당신은 여성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
참고문헌
신하나, 이민선, 존 갈리아노와 마르탱 마르지엘라 패션에 표현된 여성의 몸(복식 제60권 제7호), 한국복식학회, 2010
최진희, 이미숙, 크리스티앙 디올 '뉴룩'의 계승과 재해석에 관한 연구, 2017년, 전남대학교, 석사학위
Alison Bancroft, 패션과 정신분석학, 구민사, 2019, p93-151
Chloe Schwanz, Thanks! It has Pockets", 2018.10.02
Elle, Why Mari Grazia Chiuri Made Dior A Family Business(2021.10.08)
Vogue,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은 디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2021.05.05)
Yuniya Kawamura, Fashion-ology, Bloomsbury, 2018, p65-66
*이 글은 Antiegg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