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을 따라, 평대와 한동
길이 여러 갈래로 뻗어있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지만, 가는 방법은 다양했단 얘기다. 게스트하우스를 나서자마자 갈림길에 마주쳤는데, 옆으로 빠지는 길을 흘끔 보고 망설임 없이 노선을 꺾었다. 지난번 저녁에 서둘러 걸어왔던 가로등 없는 그 길이다. 밝은 대낮에 걷는다면 제주도 시골 정경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오전 10시 30분, 높은 채도로 반짝이는 무밭을 볼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올 때 미쯔를 챙겨왔는데, 돌담을 따라 걷는 도중에 자꾸만 군침이 돌았다. 구멍이 송송 뚫린 돌담의 시커먼 현무암이 아무래도 미쯔의 생김새와 닮았다. 망설임 없이 가방에서 미쯔를 꺼냈다. 홀로 여행하는 장점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나의 충동대로 돌진할 수 있는 것. 버즈를 꺼내 왼쪽 귀에만 끼웠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The Band Perry’의 모든 곡을 틀었다. 노래에 걸음을 맞춰 걸으며 미쯔를 서너 개씩 집어 와드득 씹었다. 새까만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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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게스트하우스 오른편에 있는 세화리를 누볐으니까 오늘은 왼편에 있는 평대리를 제대로 누비는 것이 계획이었다. 평대해변 변두리를 걷는 것, 그 외에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아, 식사만큼은 어느 정도 계획이 있었다. 점심은 전복을 요리한 음식을 먹고, 저녁은 어제 먹었던 초밥을 또 먹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싶었다. 단지 먹고 싶다는 이유로. 그 초밥은 정말 맛있었거든.
갈림길을 마주칠 때마다 걷고 싶은 길을 선택해서 걷다 보니 평대해변을 만났다. 지금까지 도두의 바다, 함덕의 바다, 세화의 바다를 보았는데 평대의 바다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하얀 등대가 있었던 세화와 달리 빨간 등대가 있었을 뿐. 그래도 제주의 바다는 얕기와 깊이에 따라 그 푸르름이 다르게 물들어있어 언제든 보기 좋았다. 횡으로 뻗은 수평선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어떻게 저렇게 기울음 하나 없이 가로로 뻗어있을까. 역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 차마 가늠할 수 없는 지구의 크기와 우주의 크기에 아득함을 느낀다. 우린 작고 작은 존재였고, 매일 뜨고 지는 시간 속에 이 작은 삶 하나를 조금씩 일구어 가며 살 뿐이란 생각을 한다. 그건 그거대로 예쁜 모습이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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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대리는 당근 마을이란다. 당근이 심어진 밭은 보지 못하고 무밭만 잔뜩 보았지만, 아무렇게나 휘집어놓은 듯한 밭에 중간중간 당근 덩어리들이 누워있는 모습은 보았다. 아무래도 2월은 당근을 수확하는 계절이 아닌가 보다. 그래도 당근 마을이라는 정체성답게 마을회관에도, 해안도로 방호벽에도 주황빛 당근 그림이 가득했다.
걷다 보니 평대해변에서 딱 머무르기 좋아보이는 카페를 발견했다. 2층에 바다를 마주보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오전 11시는 카페에 앉아있기에 이른 시각이다. 점심도 먹어야 하고, 어차피 오후에 카페에 들어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다가, 근처에 점심 먹을 곳을 찾았다. 전복이 들어가야 하는데. 하필 평대해변 쪽에는 전복집이 없었고, 바다를 따라 20분 정도 되돌아가야 했다. 꼭 이렇다니까. 평대해변을 먼저 보기로 선택한 것이 문제였을까, 전복을 고집한 것이 문제였을까? 난 최적의 동선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여행에서 최적의 동선이 얼마나 중요할까. 난 느리게 걸어야 했다. 이건 어디서든, 같은 길을 다시 걸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동선은 잊고, 먹고 싶다고 표시해두었던 명진전복에 가기로 결심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며 도댓불도 보고, 불턱도 만나고, 도깨동산도 만났다. 불턱을 설명한 표지판엔 ‘턱’ 자가 날아가 있었고, 도깨동산에 있던 정자 근처엔 의자가 뒤엉켜있었다. 제주 바람의 흔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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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을 먹고 나오는 길에도 용왕당이라고, 해녀 분들이 용왕신에게 무사를 기원하는 장소가 나왔다. 제주 곳곳엔 제주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이어오던 생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세화리처럼 박물관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평대리는 곳곳에 볼거리가 많았다. 평대리 지도를 담은 커다란 바위에 빨간색으로 표시도니 길이 있었는데, 이걸 따라가보기로 했다. 계획 없는 여행이란 선택의 연속일 뿐이다.
걷다보니 벵듸고운길이 나왔다. 벵듸는 평대마을의 옛 이름으로, 돌과 잡풀이 우거진 넓은 들판을 뜻하는 제주어라고 한다. 정말로 평대리는 널직하고 평평한 마을이었고, 돌과 잡풀이 많았다. 솔직한 이름이었다. 벵듸고운길을 걷다보니 올레길과 마주쳤다. 이 참에 올레길을 따라가보기로 결정했다. 다시 새로운 선택. 여행의 경로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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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 세 분이 소소한 담소를 나누며 뒤따라왔다. “여기 아니야?” 길을 확인하는 말들을 뒤로 하고,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사라져서 되돌아가셨나 싶었다. 한참 걷다 지도를 보니,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거였다. 올레길은 당연히 차도 들어갈 수 있는, 적어도 아스팔트로 정돈된 길일 줄 알았는데, 이 진부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던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니까 자갈이 깔린 오솔길이 보였다. 올레길이 이런 거였어? 나중에 찾아보니 ‘올레’가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어란다. 정말로 좁은 숲길, 오솔길,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덕분에 두 번이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사람 한 명만 걸어갈 수 있을 법한, 올레길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길로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 길이라 쉽게 지나쳤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서고 나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어진 분홍색과 파란색 끈. 올레길을 따라 여기저기에 묶여 있었다. 좁은 길로 이어져 있는 올레길을 헷갈려 할까봐 경로를 표시해둔 것이었다. 나뭇가지에 묶여 있거나, 튼튼한 막대기에 묶어놓고 돌담에 꽂아두거나, 가로등에 묶어두거나 다양한 방식을 사용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모양이 귀엽고 예뻤다. 곳곳에 시옷으로 표시된 화살표도 친절히 방향을 안내하고 있었다. 시옷이 아니라 사람 인이려나. 사람이 걷는 모습처럼 보였다. 화살표도 돌담에 붙어있거나, 가로등에 붙어있거나, 표지판으로 세워져있거나 제각기 다른 모습이었다. 어디에 어떻게 표시를 해둘지 고민했을 담당자의 모습이 그려져 웃음이 나왔다. 색끈은 쭉 뻗은 길을 걷는 중에도 금방금방 나왔고, 갈림길이라면 화살표가 꼭 등장했다. 헤맴을 염려한 다정의 흔적. 덕분에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올레길을 따라걸을 수 있었다.
올레길은 재밌었다. 남의 집 돌담과 그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나무들. 그중에는 감귤나무도 있었다. 그 아래 피어진 잡초와 들꽃을 구경하기도 하고, 어김없이 마주치는 곳곳의 무밭이 정겨웠다. 웃긴 건, 뜬금없이 말도 등장하고, 개도 등장하고, 고양이도 등장했다는 것이다. 생기가 넘치는 마을이었다. 나중에는 올레길로 제주를 한 바퀴 도는 것도 볼거리가 많을 것 같다. 제주를 가까이에서 보는 느낌이다.
올레길을 지나 오전에 가기로 다짐했던 카페에 들렀다. 역시나 전망은 푸르르고 환하고 밝았다. 평대해변이 한눈에 담겼다. 바다의 얕고 깊은 푸른색도, 바람을 거스르는 듯 이용하는 듯 나는 갈매기도, 바람에 펄럭이는 옷을 갈무리하고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도 모두 눈에 담겼다. 차창 밖의 그림 같은 정경을 두고 2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좋은 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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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망 좋은 카페에서 책을 더 읽거나, 써야할 글을 적어도 좋았지만 왠지 갑갑해졌다. 목적지도 없었지만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우선 저녁에 먹고 싶은 초밥을 먹기 위해 세화리로 돌아가야 했고, 해가 저물기 전에 숙소에 도착하고 싶었기 때문에 북서쪽으로 멀리 나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남동쪽 세화리 방향으로 걷자니 돌아가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결국 난 북서쪽을 선택했다. 한동리 땅 한 움큼이라도 발을 디뎌보기로.
한동리 바다도 다를 것 없이 아름다웠지만, 풍력발전기가 곳곳에 위치한 모습이 색달랐다. 한동리 위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농공단지도 나오던데, 그래서 풍력발전기를 잔뜩 세운 걸까? 하얀 풍차가 바람에 돌아가는 모습이 생동감 있었다. 한동리 바다가 특별했던 것은 어떤 꼬마아이 한 명이 쉴새없이 바닥이 드러난 해변을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어슬렁거리다가 한번씩 무언가를 주웠고, 다시 어슬렁거리다가 무언가를 빤히 쳐다보았다. 주변에 부모님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어디서 온 누구길래 저렇게 바닷가에서 혼자 잘 노는 것일까. 방파벽 위를 걸으며 한참을 쳐다보았다. 내가 시선을 거두고 다시 올레길로 돌아갈 때까지 꼬마아이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놀았다. 조용하고 따뜻한 풍경이었다. 한동리는 꼬물꼬물 귀여운 마을로 인상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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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노래를 껐다. 바람에 풀잎이 스치는 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새 소리들, 그 사이로 투박하게 울리는 내 발걸음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인기척이 나 하나뿐인 적막은 참 오랜만이었다. 도시엔 온갖 인기척이 가득하니까. 소리를 비워내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여유가 생겨나는지. 소리는 공간을 채우지만, 시간도 채웠다. 소리가 빽빽이 공간을 채울수록 시간도 빽빽이 채워지는 것 같다. 가끔 느긋해지기 위해 소리의 공백을 찾아야겠다.
세화리로 돌아가는 길도 올레길을 선택했지만, 중간중간 해변으로 빠졌다가 다시 올레길과 만났다가 다시 다른 길을 선택하는 내맘대로길로 여행했다. 멋지고 예쁘고 귀여운 것들이 나오면 멈춰서서 사진 찍어가며 걷느라 평소보다 배는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발걸음은 차곡차곡 쌓여서 숙소에 도착할 때쯤엔 2만 걸음을 채웠다. 역시 뚜벅이의 여행이란. 오늘도 풍경을 나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하루여서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