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유난히 굴곡진 현대사를 뼈로 추적하는 이야기다. 그 중심에는 한국전쟁이 있다. 이 이야기가 가능한 이유는 분명하다. 죽음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6.25 전쟁이란 북한의 남침 - 인천상륙작전 - 1.4후퇴 - 휴전으로 정리된 전선의 흔적에 불과했다. 그 안에 얼마나 자세하고 구체적인 일들이 있었을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한국인 중에 한국전쟁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353).”
나는 심지어 부끄럽게도 책을 읽는 동안 “부역자”, “궐기대회”, ‘보도연맹”, “노근리 사건”, “여순사건” 등의 주요 단어가 낯설어 검색에 의지해야 했다. 놀라운 건 내가 한국사검정능력시험에서 1급을 받았었다는 사실이다. 시험으로 접근하는 역사. 이것이 나를 비롯한 이 시대 청년의 현실일 것이다.
종종 우리나라 곳곳을 이동하며 땅 밑에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을지 생각해보곤 했다. 역사적으로 침략도 많았고, 일제강점기에 6.25 전쟁까지 거쳤으니 피로 뒤덮인 땅이다. 그래서 현충일에는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음악을 들으며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분들에게 감사했고, 그 죽음을 추모했다. 그런데 학살된 민간인이라니? 내가 추모를 위해 상상한 대상 중에 학살된 민간인은 없었다.
적이라는 절대적, 적대적 존재
전쟁에서 생기는 민간인 학살은 그 자체로 충격인데, 책에서 유골들이 전하는 학살은 더 끔찍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우리나라 군인이 우리나라 민간인을 죽였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6.25전쟁에서 민간인 인명 피해 규모는 100만 명에 가깝다고 한다(전쟁기념관). 왜 이렇게 많은 민간인이 죽었는가?
책에 나온 기록들로 유추하면 두 가지 이유가 보인다. 첫째, 기존에 마을에 존재했던 갈등이 전쟁을 명목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다른 기록도 찾아보니 지주와 소작농 간의 갈등이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있었고, 평소의 질시와 미움이 시대의 분위기를 타고 폭력으로 변질됐다. 이런 움직임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두 번째 이유와 연결된다.
둘째, 이념 싸움이다. 이념은 사람을 쉽게 편가르기했고, 상대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게 했다. 원래부터 있었던 마을 사람들끼리의 갈등이 살해에 이를 정도로 심화된 것은 이념의 구분이 살해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눈엣가시인 대상에 그럴 듯한 죄목을 적용할 수 있었다. 국군이 민간인을 죽이는 목적도 적의 이념을 따르는 자들의 처치였다. ‘적’이라는 추상적인 타자화는 상대방의 존재를 지운다. 인격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분노와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 순간의 죄책감조차 지우는 것이다.
『기후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학살을 분석하는데, 끔찍한 학살로 이어지는 근본적 원인은 편가르기였다고 말한다. ‘르완다 학살,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유고슬라비아의 학살,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은 상대편에 대한 증오, 혐오, 두려움에서부터 폭발한 결과였다. 그 감정은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념은 그 편가르기의 중심에 있다. ‘빨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구덩이 넣고 마구 죽여댄 것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참혹한 일들이 발생한 역사에 대해 어떻게 반성하고 있는가? 학살은 가해자 개인의 문제뿐일까? 시위에서 적대 세력을 호명하는 경우는 요즘도 흔하다. ‘빨갱이’, ‘종북 세력’ 등의 단어는 여전히 심심찮게 들린다. 세월호 유가족을 빨갱이라고 지칭한 사례도 들었다. 이렇게 적이라는 개념이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으로 활용되었을 때, 어떤 일까지 발생할 수 있는지 이 책이 담고 있다. 앞으로도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있는가? 무섭다. 잘못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참회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정부의 무능과 비윤리성
남은 궁금증이 있다. 원래 전쟁에서는 전선이 이동하면서 민간인을 적대세력으로 의심하고 죽이는 일이 흔한가? 이전에 읽었던 전쟁 관련된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에서 소련 군인들은 독일과 싸우며 후방의 민간인을 지키는 데 사명감을 불태웠다. 지키기 위한 싸움을 보면서 숭고함, 안타까움, 슬픔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왜 우리 군은 그러지 못했는가? 또는 그러지 않았는가? 서울 홍제리에서는 민간인을 향한 국군의 잔인한 처사를 영국군이 보다 못해 강력히 저지했다고 한다. 정말 이념 때문에 국군은 민간인을 보호하지 않고 사살하는 데 앞장섰을까?
국군의 행동 위에는 명령이 있었다. 좌익 세력 또는 좌익 세력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처형하라는 상부의 명령. 여기서 상부란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처형이라는 이름의 여러 학살을 지시했던 듯하다(심규상). 그러니까 민간인의 피해를 더욱 키운 또 다른 원인은 당시 정부의 미성숙함, 무능, 그리고 비윤리성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중 하나는 ‘광주대단지사건’인데, 정부의 무능과 비윤리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공식 명칭으로는 ‘8.10 성남 민권 운동’이라고 한다. 정부는 빈곤층을 없애기 위해 말 그대로 도시 밖으로 몰아냈는데, 계획도 준비도 없어 방치에 가까운 조치였다. 한국전쟁 당시 부정확한 민간인 통솔, 한국전쟁 이후의 미흡한 수습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부의 무능과 비슷하다. 그리고 국민을 죽어도 되고 죽여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 가벼운 시각이 비슷하다. 생명을 경시하는 비윤리성은 국가가 건립되는 초기 단계라 부실했다는 말로는 변명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부역자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고, 전쟁 후에도 충분한 조사 없이 부역자(로 추정되는 사람들)를 사형함으로써 추가적인 죽음이 발생한 것이며, 연좌제라는 이유로 유가족이 짓눌러진 것이다. 읽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이 책에서 기록한 유골발굴작업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70년 전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낱낱의 이야기를 파헤쳐준 것. 우리가 배운 역사가 어떤 구체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내게 6.25 전쟁이 책을 읽기 전에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불과했다면, 읽은 후에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뽑고 뒤흔든 참혹하고 비극적인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활자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바로 전 세대의 삶에서 펄떡펄떡 살아있는 현실로서의 역사를.
둘째, ‘아무렇게나 묻힌 죽음’을 파헤친 것.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 학살된 민간인들, 강제징용자들… 장례 문화를 거치지 못하고 마을 뒷산에 아무렇게나 묻힌 사람들은 어떤 소외나 배재, 방치, 부당함, 잔인함, 폭력을 안고 있다. 이런 죽음은 소식도 기록도 없이 그대로 ‘묻혔다’. 섬세한 작업을 오랜 기간 집요하게 진행하면서 중요한 사실들을 밝혀낸 분들께 존경을 느낀다.
셋째, 국가의 역할에 질문을 던진 것. 전쟁 상황에서, 또는 전쟁 이후의 상황에서, 또는 언제 전쟁이 발생할지 모르는 평화의 상황에서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않는다면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현재에도 적용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70년 전보다 더 성숙하고 윤리성을 갖추었는가?
참고문헌
하랄드 벨처. (2010). 기후전쟁. 영림카디널.
전쟁기념관 https://www.warmemo.or.kr:8443/assets/webzine/202303/special2.html
심규상. (2024. 2. 21). 영화 <건국전쟁>에 피눈물..."민간인 수십만명 죽였는데 추앙하나". 오마이뉴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03006
김기진. (2009. 1. 13). 한국전쟁 또하나의 비극, 美기밀문서로 본 '민간인 학살' 진상. 부산일보. https://www.busan.com/view/section/view.php?code=20040708000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