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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사진과 자기이국화(Self-exoticism)

by 김희량 Mar 07. 2025

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출신학교를 밝혀야 해서 고민이 많았으나 너무 쓰고 싶어져서 쓴다. 어떤 생각들은 그 시점이 지나면 완전히 휘발되어 버리기에.


*


나는 600년 전에 세워진 학교를 다녔고, 다니는 중이다. 이 학교의 캠퍼스에는 수백 년 전부터 자리옛 학교의 모습이 남아 있다. 평소엔 그저 지나칠 뿐이니 마치 흔적과도 같달까. 아니, 흔적처럼 남아 이 학교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증명하는 공간이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이 옛 성균관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특히 비천당과 명륜당은 사진을 찍으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주요 포토스팟이다. 수원에 위치한 자연과학 캠퍼스의 학생들도 올라와서 찍을 정도이니, 졸업생들에게 이곳은 졸업 사진을 남겨야 하는 필수 코스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비천당 앞에서 학사모를 던졌고, 명륜당 앞에서 꽃다발을 들었다.


졸업 시즌이 지나고 며칠 후, 조용한 비천당 옆을 지나던 중이었다. 문득 현판에 눈길이 갔는데, 도무지 한자를 읽을 수 없었다. 대충 날 비에 하늘 천 자 아니냐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낯선 한자를 마주하고 멋쩍어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뜻도 모르고 이 앞에서 사진을 잘도 찍었구나.


지난 번에 글에서 '문화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을 언급했다. 문화 전유는 오리엔탈리즘과 같이 문화를 향유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위계를 폭로하는 개념이다. 서구 국가가 비서구 국가의 문화를 영감이라는 명목으로 쉽게 가져오고 왜곡하고 도용하는 행위를 지적한다. 1990년대 들어서야 생겨난 관점이다.


그런데 비서구 국가 내부에서도 복잡한 면모가 존재한다. 서구화를 거치고 서구 중심의 사회문화적 가치 체계를 학습해오면서 서구의 시각을 내면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국의 전통 문화를 직접 재해석하면서도 서구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반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자기이국화(self-exoticism)'이다.


문화 전유의 핵심은 타 문화의 '이국적인' 성격만을 쉽게 취하는 것이다. 특히 새롭고 참신한 것을 계속해서 제시해야 하는 패션 업계에서 타 문화의 이국성이란 매력적인 재료다. 하지만 늘 취하는 쪽이 정해져 있고 그 과정에서 깊은 역사문화적 가치가 얄팍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결국 타자화다. 내가 아닌, 대상으로 여기는 관점이다. 그런데 자기이국화는 자기의 문화를 이국적으로,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이미 서구의 시각이 우리에게 깊이 내재화됐기에.


여기서 내 졸업사진을 검토해보자. 비천당의 뜻도 모르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나는, 그저 '옛 성균관'이라는 배경이 필요했을 뿐이다. 내가 항상 오가며 수업을 듣고 공부를 했던 건물이 아니라, 학교를 증명할 만한, 또는 졸업을 기념할 만한 예쁘고 상징적인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옛 성균관은 배경으로 평면화될 만한 공간이 아님에도. 옛 성균관은 평소의 (서구화된) 일상과는 다르기에 이색적인 모습의 기념적인 공간이 되었다.  


비천당의 뜻도 모르고 옛 성균관에 대해 깊이 고민한 시간도 없이 줄 서서 사진을 찍던 내 모습이야말로 셀프 오리엔탈리즘이자 자기이국화였다. 600년 전통을 외치는 학교에서 그 시간과 의미를 체감한 적도 없이 옛 건물을 상징과 배경으로 소비했다. 분명 내가 속한 집단의 역사이자 문화임에도 타자처럼 취급하고 이국적인 대상으로서 활용했다.


이건 서구화의 영향으로 문화의 계승이 단절된 비서구 국가의 숙명일까? 우린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과거에 살았던 조상의 문화와는 분리된 느낌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로 갈수록 이 경향은 더 짙어지지 않을까. 전통 문화를 어떻게 다루고 대해야 하는지 질문하기 이전에 전통 문화를 쳐다보고나 있는지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


비천당은 '클 비'에 '밝힐 천'이라고 한다. 두 번째 과거시험을 치르던 곳이었다고... 학교를 다니던 10년 동안 처음 안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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