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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zoos May 15. 2023

죄책감의 냄새

송파나루역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서있던 나의 눈에 빈자리가 보인 건.



<내겐 휴가가 필요해>라는 단편 소설이 점점 흥미로워지는 즈음이었다, 10여 년 간 매일 도서관에서 300번대와 900번대의 책을 읽던 한 노인이 자살했다. 그 소식을 들은 도서관 직원들은 여름 휴가 일정 조율을 위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도서관장이 올해 여름 휴가는 막내부터 일정을 잡으라는 파격적인 지시를 했기 때문이었다.



내릴 역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냥 서서 갈까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송파나루역은 자주, 급행을 보내느라 오랫동안 정차하기도 하는 역이다. 그래, 소설이 한참 재밌어 지고 있으니까 잠깐 앉아서 절정으로 향해가는 것을 찬찬히 읽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보였다. 출입문 바로 옆, 지하철에서 선호도가 가장 높은 자리. 그 자리 구석에 방금 앉았던 사람의 주머니에서 흘러 나왔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가지런히 세워진 지갑. 순간 내 지갑인가? 하고 착각할 만큼 내 것과 비슷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확인해보니 내 것은 아니었다. 지폐를 넣는 용도의 크고 두꺼운 지갑이 아니라 주로 카드와 명함 정도를 보관하는 작은 검은색 가죽 지갑이었다. 카드나 명함을 잔뜩 넣은 건지 꽤나 두툼했다.



일단 자리에 앉았다. 소설이 너무 재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집중해서 읽고 싶었지만, 의자벽과 내 허벅지 사이에 여전히 세워져 있는 이 작고 검은 지갑을 어떻게하지? 하는 생각 때문에 금세 산만해져서 같은 단락을 읽고 또 읽었다. 도무지 소설의 내용이 눈에,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요즘 이런 방식의 사기나 절취 수법이 있나? 현금인출기 옆에 일부러 지갑을 놔두고 가는 식으로 사람들의 선의에 뒷통수치는 수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괜히 찾아 주려다가 내가 더 귀찮아 지는 거 아냐?  그 뭐라더라? 점유이탈물횡령죄? 뭐 그런 걸로 걸고 넘어진 다음 합의금을 받아내는 수법이라던가. 하지만 그런 수법을 쓰려면 이렇게 아무도 없는 지하철 의자에 놔두겠어? 좀전에 내린 젊은 사람이 흘린 것 같은데... 그래, 지하철 발권 창구까지만 갖다주면 그 이후는 지하철공사에서 알아서 하겠지? 요즘 유실물센터 엄청 잘 되어 있다던데. 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지갑을 주워 무릎에 올려둔 가방 위에 포개 두었다. 점유이탈물을 횡령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라고 티를 내야 했기 때문에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노인의 직업은 형사였다. 그리고 그가 가족들과 연을 끊고 작은 바닷가 도시에서 책을 읽던 이유가 밝혀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쫓아 낚시배를 타고 작은 갯바위에 들어갔다가 깜빡 잠드는 바람에 돌아 나오는 배를 놓쳤다고 했다. 그러면서 며칠을 그 작은 무인도에서 혼자 버텨야 했고, 아무래도 찜찜한 느김이 들어 돌아온 낚시배의 선장 덕에 탈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일이 있은 뒤, 노인의 인생이 바뀌었다.



어? 지금 이 지하철은 9호선이잖아. 나는 5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지갑의 주인은 일단 송파나루역으로 와서 지갑을 찾겠지? 그렇다면 역시 9호선 창구에 가져다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굳이 내가 올림픽공원역에서 개찰구 밖으로 나갔다 와야하고, 그러면 귀가 시간이 그만큼 늦어지겠네? 5호선 창구에 맡기는 건, 지갑 주인도 오히려 귀찮아지는 거 아닐까?



에이, 그냥 놔두자. 서로가 귀찮아지는 일 뿐이다. 열차에 사람도 얼마 없고, 이제 곧 종점으로 들어갈 열차니까 청소하시는 분이 보고 분실물 센터로 보내 주시겠지. 그래, 이건 그냥 서로가 귀찮아 지는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가방 위에 올려두었던 지갑을 다시 원래의 자리에, 의자벽과 내 허벅지 사이에 세워두었다.



그때부터, 갑자기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주위에 사람이 지나가면서 흘린 냄새도 아니었고, 특별히 지갑을 꺼내거나 만진 것도 아니었다. 가죽의 냄새였다. 손때 묻은 가죽의 냄새. 내가 가지고 다니는 가죽 지갑에서 흔히 맡던 그 냄새. 내가 지갑을 꺼냈나? 하고 착각할 만큼 선명하게 느껴지는 가죽 냄새. 신경이 쓰였다. 어떤 감정이 후각을 착각하게 만든 것이었다. 죄책감. 그래 그런 것이었을 거다.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 후각으로 실체화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소설이 너무 좋았다. 디테일한 묘사들이 좋았음은 물론이고,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것 같은 사건의 전개가 너무 좋았다. 예상과 전혀 다른 주제였고,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주제였으나 작가 특유의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문체로 쓰인 것도 좋았다. 솔직히 이번 단편집에서 그동안 읽은 소설들은 뭔가 작가의 연습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야들야들한 문체는 워낙 좋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는 단편들이 아쉬웠는데, 바로 이 작품. 한 노인의 이야기는 참 좋았다.



죄책감이 후각으로 실체화될수도 있구나. 언젠가 글을 쓰게 된다면 후각에 대한 묘사를 훨씬 더 신경 써봐야 겠다는 다짐 같은 것을 했다.



올림픽공원역에 도착했을 때, 소설은 마지막 한 페이지를 남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문 앞에 일어서서 하차를 준비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텐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열차가 완전히 정차하고 문이 열릴 때까지 소설을 읽었다. 결말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가 일어서 버리면 내 허벅지 옆에 세워둔 지갑이 보일테고, 혹시라도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지갑을 보고 나에게 말을 걸면 내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귀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나의 이기적인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열차가 정차하고, 문이 열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급하게 일어서서 열차에서 내렸다.



죄책감은 열차에 태워, 종점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를.





얼마 전 퇴근길에 있었던 일을 인스타에 올렸는데, 급하게 쓴 것 같아서 조금 정리/수정해서 이쪽에도 올려본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에 써둔 요런 글들을 이쪽으로 옮겨오면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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