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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Sep 04. 2023

마라톤대회에 나가 완벽하게 패배했다

어제 10km를 달렸다고 해서, 오늘 10km를 달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6개월 전쯤일까. 마라톤대회 10km 코스에 나가 7km를 꾸준히 달리고, 잠시 걷는 시간도 있었지만 끝까지 달려 완주했다.


9월 3일 오늘은 마라톤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역시나 10km를 신청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5km는 달릴 수 있으니 긴장감이 없어서 한계를 넘어보고자 10km를 접수했다. 접수할 때는 경기 시작일 3개월 전이라, 천천히 연습하고 훈련하면 무리 없이 뛰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안일함은 내가 나를 잘 모를 때, 게으른 자기관찰에서 비롯된다. 나는 사실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달리면서 느끼게 되는 좋은 기분이나 상쾌함을 부정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달리기보다 더 좋아하는 운동을 할뿐이다. 달리기는 다섯 손가락 중에서도 새끼손가락 정도 되겠다. 


우선 재미있는 운동을 하기에 ‘달리기’는 언젠가부터 숙제가 되었다. 연습해야 하는데, 10km 달려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만 남발되었다. 그럴수록 몸은 더 큰 저항으로 ‘달리기’를 밀어낸다. 내 탓이 아니라, 날씨 탓을 한다. 야외에서 달리기에는 살인적으로 무더운 날씨였다. 새벽에 달리면 된다고? 새벽에는 잠을 잘 것이다. 저녁에는 좋아하는 수영을 하러 실내수영장으로 갈 것이다. 어영부영 이런 식으로 지내다 결국 마라톤대회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과 저급한 마음이 함께 싸운다. 5km라도 달려야 대회 날 조금이라도 달릴 수 있을텐데,라는 조급함과 까짓것 그냥 나가지 말지.라는 저급함의 투닥거림에 결국 저급한 마음이 졌다. 가까운 대회장이고, 많은 마라토너들이 운집해 있는 그 에너지의 향유를 쉽게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가까스로 해질녘 헬스장에 들러 러닝머신으로 뛰는 게 고작이다. 러닝머신으로 뛰려니 지루해서 3km 이상을 뛰지 못한다. 


습관이란 하루아침에 변할 수 없듯, 결국 달리는 습관을 들이지 못한 채 대회 당일이 되었다. 연일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가 질린 상황이라, 유심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일기예보 상으로는 비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예상된다. 더 이상의 생각은 금물, 이젠 몸을 대회장으로 옮길 차례다. 출발 시간 가까이 대회장에 도착해 터덜터덜 뛰면서 간단히 몸을 풀고, 달릴 채비를 한다. 하프 코스가 제일 먼저 출발하고, 10km코스의 사람들이 출발한다. 


무조건 천천히, 천천히 뛰자. 절대 앞지르겠다는 무리한 욕심은 내지 않았다. 아니, 욕심을 낼 수 없었다. 오르막길이 유독 길어서 다리에 쇠뭉탱이 추를 하나 매달고 뛰는 것 같았다. 내리막길이 나와도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강한 햇빛의 열기 탓이다. 머리가 지끈 거린다. 더위를 먹은 것처럼 눈에 힘이 빠져 시야가 흐릿해지는 기분이다. ‘살고 봐야지’, 생존본능이 꿈틀거리며 다리가 걷기 시작한다. ‘더위 먹어서 걷는 거예요. 머리가 아파서 더 이상 뛸 수가 없어요.’ 자기변명을 맘속으로 외치면서 걷는다. 옆에서 ‘화이팅!’ ‘뛸 수 있어.’ 격려하는 분위기의 시선을 한껏 받아도 다리는 외면한다. 절대 뛸 마음이 없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에 한숨이 나온다. 지글거리는 아스팔트 도로와 머리 위로 쏟아지는 열기를 받아내며 종종 걸음을 친다.


걷다보니, 내 옆으로 뛰어가는 사람들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린 속도로 보인다. 한 여인은 유모차를 밀면서 뛴다. 5살은 되어 보이는 꽤 덩치가 큰 여자애를 앉히고 뛴다. “우와~” 감탄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나도 입을 떡 벌리고 한참을 쳐다본다. 누군가는 중량 달리기를 한다고 말한다. 한 어르신은 70대의 여성이었는데, 달리는 폼이 어색했다. 다리가 일자가 아닌, 갈지자로 움직이듯 교차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려고, 뛰려고 애썼다. 


머리카락까지 흠뻑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뛰는 오는 사람이 있으면 걸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뛰는 척을 했다. 척은 5분도 채 가지 못했다. 마음이 몸을 압도했다. ‘더 이상 뛰지 않겠어.’ 이미 뛰기를 포기하고, 걷기로 마음을 결정했기에 뛸 수 있는 체력이 남았어도 뛰어지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였다. 더위 먹은 채, 두통이 시작됐고 자칫하다간 우스운 꼴로 걷지도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을 판이었다. 그동안 뙤약볕에 노출되지 않았던 탓을 해본다. 야외에서 활동할 일이 많지 않은 이유로 실내생활이 많았다. 에어컨 빵빵한 곳에서 쌀쌀하게 더운 여름을 보냈다. 몸은 ‘더위’에 취약했다. 달리기만 고려했지, ‘더위’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패배했다. 더위에 패배했고, 달리기에 패배했다. 더위에 노출되지 못했고, 달리기 훈련은 미비했다. 몸은 더할 나위 없이 진실했고, 정직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나가는 풍경을 음미했다. 내가 사는 지역인데, 이런 곳이 있었나 싶다. 뛰었을 때는 눈에 담지 못한 풍경들이, 고스란히 담아졌다. 걸어가는 사람들의 등판에 새긴 동호회 이름을 읽어가며 그들이 평소에 모여서 뛰었을 시간들을 떠올렸다. 


한 남자가 땀범벅으로 상의를 탈의하고, 까무잡잡하게 햇볕에 탄 탱탱하고 단단한 근육의 등을 내보이며 달린다. ‘멋있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수줍은 감탄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진다. 움직이는 몸, 뛰는 몸이 얼마나 멋진지. 또 한 사람이 뛰어온다. 숨소리가 거칠다 못해 처절한 늙은 노인이다. 그는 걷지 않는다. 자신과의 약속을 꼭 지켜내겠다는 다짐이 그 처절한 숨소리에서 들리는 듯하다. 


8km 표지판이 보이고, 어느덧 도착점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난 여전히 걷는다. 뛰려는 마음을 내어도 더 이상 소용없다. 몸이 이미 포기했다. 걷기에도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너무 더운 날씨 탓에 길 중간에 있는 편의점에서 한 숨 쉬어가는 이들도 보인다. 나도 저들 속에 끼어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서 앉아 쉬고 싶다. ‘에헤~ 얼마 안 남았어.’ 마음속에서 재촉이는 소리가 들린다. 완주는 하자. 머리는 지끈거리고, 다리는 무겁고, 눈꺼풀은 뻑뻑하다. 몸 안의 수분은 말라가고, 손을 보니 퉁퉁 부어있다. 고무장갑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것 같은, 이건 누구의 손이지. 순간 낯선 손의 모양에 기겁한다.


문득, 뛰고 있는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저들은 ‘더위’도 먹지 않나. 도대체 얼마나 많은 더위 속에서 뛰었기에 땀을 철철 흘려가며 뛸 수 있는 건가. 경건하게 응원을 하며 앞서가는 이들을 바라본다. 나의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자, 미소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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