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올케 언니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퇴근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청소에, 빨래에 저녁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었다. 반면 엄마는 다리가 아파서 청소기도 못 돌리는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소파 가운데에 앉아 그저 온종일 저 혼자 떠드는 텔레비전만 바라봤다. 그러다 언니는 앞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다 우연히 유리에 비친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며느리인 자신의 동선을 따라 시어머니의 시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소처럼 튼튼하던 시어머니는 지친 모습으로 퇴근하고 돌아온 며느리 눈치만 살피는 노인네로 앉아있었다.
이제 언니는 아파트 슈퍼에서 시어머니가 외상으로 어린 채린이 승환이 주려고 산 과자값을 갚던 일, 시어머니가 친구들하고 점심 먹으러 간 추어탕집에서 며느리가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추어탕을 포장해 온 일, 석류, 생밤, 설탕 친 토마토, 살구 등 제철 과일을 우적우적 맛나게 먹던 시어머니를 생각한다. 친정엄마보다 시어머니 팔자를 닮아가는 자신을 보며 짜증스럽다가도 가슴에 날카롭게 날아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 집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아파트에 살던 셋째 언니는 친정 식구들이 오산에 오자마자 현주, 주희 두 딸을 엄마에게 맡기고 출산 후 찐 살을 빼기 위해 집 앞 헬스장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같은 아파트, 같은 동 할머니와 친하게 되었다. 그러다 각자 집에 결혼 안 한 똥차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똥차들은 할머니의 막내아들과 바로 나였다. 오지라퍼 언니는 그럼 똥차들을 한번 치워보자고 선 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오산에 와서 거의 백번 가까이 선을 봤다. 선본 남자들은 전국구였고 튼튼하고 일 잘하는 아가씨를 찾던 미국 교포도 두 명 있었다. 그러나 내 짝은 내가 사는 아파트 1km 반경 내에 있었고 두 똥차는 소개팅 후 8개월 만에 결혼해버렸다.
연애하던 중 드디어 엄마에게 신랑을 소개하는 날이 되었다. 집에 온 신랑은 잔뜩 긴장한 채 엄마 앞에 앉았다. 엄마가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가 하나도 맘에 안 드네.”
아니 이건 무슨 망언인가.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만은 곱다고 쓰다듬는다지만 이건 망신이자 악몽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그렇게 귀한 딸이란 말인가. 아니면 엄마는 저런 독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는 냉혈한인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 후 생각해보니 엄마는 당신이 37살에 어렵게 낳아 엄마의 수족이 되어 주던 막내딸을 그 어떤 총각이 와도 주기 아깝고 생각했을 것 같다. 엄마의 독설은 신랑이 결격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엄마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섭섭함’에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신랑이 받았을 상처가 마음에 걸리고 신랑이 장모를 편협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이 싫어서 결혼 후 어느 날 엄마한테 부탁했다.
“엄마, 박 서방한테 결혼 전에 모진 말한 거 기억나?”
“그래, 왜?”
“엄마 오늘 박 서방한테 사과하는 거 어때?”
“(잠시 생각하더니) 오냐.”
투석액을 빼느라 다리를 달달 떨고 있던 엄마는 의외로 순순히 그 어색하고 껄끄러운 사과를 하겠다고 했다. 욕을 들으면 들었지 남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일이 없던 엄마였다. 나는 엄마 맘이 변할까 봐 얼른 신랑을 투석 방으로 밀어 넣었고 곧 신랑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왔다. 엄마는 신랑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 서방, 박 서방이 맘에 안 든다는 말은 미안하네. 성격 드러운 우리 딸이랑 결혼해서 고마워”
아! 엄마가 변했다. 무엇이 엄마를 변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엄마가 무척 고마웠다.
투석한 지 한 3, 4년쯤 되면서 엄마는 한밤중에 자다가 자주 소리를 지르곤 했다. 목청 좋은 할머니랑 같이 자던 고등학생 채린이는 그 소리에 놀라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리고 낮 투석을 도와주러 가면 엄마는 간밤에 시커먼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방문 앞에 서 있어서 가라고 소리 질렀다고 했다. 엄마가 어찌나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던지 그 뒤로 서너 번 더 온 저승사자는 맥없이 물러갔다. 또 어떤 날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젠 같이 가자고 엄마를 데리러 왔는데 엄마는 아버지에게 쌍욕을 퍼부어 주었다고 했다. 엄마의 철옹성 같은 삶에 대한 의지 앞에 저승사자도 아버지도 어쩔 도리가 없었나 보다. 저승사자 사건으로 엄마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재미있는 해프닝으로만 여겼다.
엄마의 투석은 아침 6시부터 시작해 낮 12시, 저녁 6시, 자정 이렇게 4번 이루어졌다. 새벽과 자정 투석은 큰 오빠네가, 낮 투석은 셋째 언니와 내가 맡았다. 낮에 가서 엄마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어느 날 엄마에게 넌지시 물었다.
“엄마, 아버지 용서할 수 있어?”
“아니, 죽어도 용서할 수 없지.”
“엄마 그래도 아버지를 용서해야 다음 생에는 좋게 태어날 수 있다는데?”
“아니야. 나는 느그 아버지 죽어도 용서 못 해. 다시는 안 만날 거여.”
“엄마는 그러면 여자로 태어날 거야 남자로 태어날 거야?”
“나는 새가 될란다. 그래서 훨훨 날아가야제. 암것도 필요 없이 그냥 훨훨 날아갈 거여.”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리만큼 그즈음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엄마와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그때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라는 엄마의 말이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함부로 타인에게 ‘누군가를 용서하라’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엄마가 돌아가신 뒤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투석하면서 엄마는 괄약근이 약해져서 똥을 자주 옷에 싸버렸다. 하는 수 없이 엄마는 기저귀를 차고 생활했다. 엄마는 하루 먹는 약만 해도 밥 한 공기는 족히 되었다. 그래서인지 구린내는 지독했고 색깔도 까맸다. 하루는 오빠 집에 가니 올케언니가 퇴근하고 와서 엄마를 씩씩대며 씻기고 있었다. 엄마가 옷에 똥을 싸서 기저귀 밖으로 넘쳐 그야말로 칠갑을 한 것이다. 어떤 날은 큰오빠 부부가 집을 비운 뒤 채린이와 엄마만 있었다. 그날도 엄마가 똥을 너무 많이 싸서 또 기저귀 밖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채린이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가보니 18살 채린이가 겨우겨우 엄마를 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씻기고 있었다. 우리는 얼른 들어가 똥을 치우고 엄마를 씻겼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 똥 냄새는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 똥 냄새는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엄마의 두 다리는 투석으로 더 비대해진 몸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엄마는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누워있게 되었다. 누워서 볼 일을 기저귀에다 봐야 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 상황에서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큰 오빠네는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볼 새도 없이 엄마의 똥을 치우는 일에 온 식구가 동원되었다. 올케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 기저귀부터 확인하는데 너무 많이 싸버린 날 아침엔 채린이 승환이까지 네 식구가 엄마를 목욕탕으로 옮겨 씻겨야 하는 나날들이었다. 늙어가는 올케언니의 건강도 걱정이었고 그런 식으로 엄마를 옮기다가 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우린 결심을 해야 했다.
사진:pex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