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신장
반송에서 5년 동안 엄마는 일반 내과에서 당뇨약과 혈압약을 한 달에 한 번 타서 복용했다. 이사 전 반송 내과 의사에게 받았던 소견서를 갖고 셋째 언니와 엄마는 오산 시내에 있는 내과로 향했다. 소견서를 한참 보던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약을 이렇게 오랫동안 복용하셨습니까?”
“네. 왜 그러세요?”
“이 약은 오래 먹으면 신장이 훼손되는데 몸에 이상이 없으셨어요?”
엄마가 복용했던 혈압약을 보고 의사는 말했다.
“엄마가 잔기침을 많이 해서 잠을 잘 못 주무신대요.”
엄마는 반송에서부터 기침 때문에 한밤중에도 자주 깨곤 했다.
“아, 잔기침요? 그것도 문제지만 신장이 제일 걱정이네요. 당장 큰 병원 가보세요. 이 의사분 저도 아는 분인데 왜 이렇게 처방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큰 병원요?”
그 오산 내과 의사는 성빈센트병원으로 가보라며 소견서를 써주었다.
엄마는 신장에 이상이 있을 거라는 의사의 말이 꺼림칙했지만 믿지 않으려고 했다. 셋째 언니는 성빈센트병원에 예약하고 며칠 뒤 엄마를 모시고 가게 되었다. 성빈센트병원에서 알려준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반송 내과에서 5년 내내 먹은 혈압약으로 인해 엄마는 기침도 했고 그 약으로 인해 신장 한쪽은 사라지고 남아있던 한쪽마저 기능을 30%밖에 해내고 있지 않다고 했다. 단 한 번의 처방전을 보고 오산 의사는 알아낸 그 중요한 사실을 반송 의사는 5년 동안 알지 못했다는 것이 더 기가 막혔다. 우리도 엄마를 종합검진 한번 안 하고 무식하게 약만 먹게 한 잘못에선 자유롭지 못했지만, 반송 의사만 욕하고 또 욕했다.
성빈센트병원 의사는 엄마에게 당장 투석을 권유했다. 투석은 신장이 조금 남아있을 때 하는 것이 좋으며 투석을 하지 않으면 요독으로 인해 쇼크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니 지하에 있는 혈액투석실을 한번 가보라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투석실에 가서 더 기겁했다. 그곳에 거무스레한 낯빛에 힘없이 축 처진 모습으로 눈을 감고 누워있는 투석환자들이 엄마 눈엔 마치 산 송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날 본 투석실의 충격으로 투석만은 미루고픈 마음이 더 강해졌고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엄마와 우리 자매는 의사의 경고를 너무도 쉽게 무시해버렸다.
죽어서도 만나지 맙시다
오산에 와서 학습지 회사에 다니던 나는 악착같이 적금을 들어 1년에 천만 원이란 돈을 손에 쥐게 되어 29살 11월에 말레이시아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6개월 예정이었으나 그 당시 말레이시아는 식비가 말도 안 되게 쌌기 때문에 천만 원으로 어쩌면 1년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에서 내가 머물던 페탈링 자야( Petaling Jaya, PJ)는 택시로 20분 거리의 도시로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대학인 말라야 대학교(University of Malaya)가 있다. 한국에서 어학원 ELS PJ 지점에 레벨 테스트 신청과 숙소 예약을 하고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말레이시아에서 3개월 정도 지나던 어느 날 셋째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위독하니까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눈물이 흐르고 몸이 벌벌 떨렸다. 정신이 아득해져 항공기 예약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가 위독하다니 갑자기 앞이 캄캄했다. 하는 수 없이 아는 동생이 와서 항공기를 예약해줘서 다시 한국으로 향했다.
2004년 3월은 기상청이 관측을 시작한 이래 경기, 충청지역에 3월에 내린 적설량의 최고 기록을 경신했을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오산도 온통 눈이었다. 아버지는 성빈센트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이미 의식이 없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가는 법이 거의 없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살고 있던 셋째 언니 집도 딱 한 번 가봤고 그것도 숨이 가빠서 한번 쉬어야 할 정도로 아버지는 체력이 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갑자기 오한이 들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동네 내과를 가보니 폐가 심상치 않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엄마가 다니던 성빈센트병원에 가니 숨이 가빠지는 증상까지 보이며 심각해져 입원해야 했다. 급기야 자가 호흡이 되지 않아 기도삽관까지 한 후 말레이시아에서 귀국해서 내가 아버지의 병구완을 맡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반 병실과 중환자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또 중환자실에 오래 머물게 되었다.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병원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호흡기를 떼면 돌아가시는 상황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처음 맞는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지 몰라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 사시는 외삼촌이 오셔서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만 의존해서 고통스럽게 연명하고 있는 아버지와 자식들의 부담을 생각해서 집 근처 병원으로 옮기라고 조언해주었다. 성빈센트병원에서는 아버지를 오산으로 모시기 전 우리에게 각서를 요구했고 그런 다음 집 근처에 있는 서울병원 중환자실에 아버지를 모실 수 있었다.
나는 아침 7시마다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다. 아버지를 서울병원으로 모신 3일째 되던 날도 병원으로 향했다. 중환자실 앞 복도에 앉아 대기하던 내게 간호사가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며 얼른 들어오라고 했다. 주삿바늘이 꽂힌 채 퉁퉁 부어있는 차가운 아버지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아버지와 영영 이별했다. 나는 불행한 언니들의 결혼 생활을 보며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임종 순간에 결혼하지 않은 게 너무 죄송하다는 황당한 생각을 했다. 왜 진작에 결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보통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마치 아버지가 마지막에 내게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너를 시집보낼 때까지 살랑가 모르것다.”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막내딸만 결혼식장에 손을 잡고 들어가지 못해서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 아버지는 고작 내 결혼 걱정을 했던 것일까. 나는 울면서 집에 전화했다. “아버지 돌아가셨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마침내 투석
아버지한테는 미안하지만, 엄마도 우리 형제들도 아버지가 원하는 만큼 애도하지는 못한 것 같다. 대신에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그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형제간의 친밀감을 느꼈다. 특히 손님같이 느껴지던 작은 올케언니는 그제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그 전보다 말을 많이 하거나 관계 개선을 위해 특별한 시도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장례식장에 함께 머물며 조문객을 맞고 같이 밥을 먹고 조문객이 뜸한 시간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나누었을 뿐인데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좁혀 있었고 나도 언니가 자세히 보였다. 아이가 없던 작은 오빠네는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큰아들 중현이가 생겨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아버지를 미워했던 우리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중현이의 잉태를 두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만든 ‘필연의 선물’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나주 선산에 묻혔다. 배밭이 내려다보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 작은 큰아버지가 묻혀있는 그곳의 아버지 자리로 돌아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묘 옆에 엄마의 가묘가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틈만 나면 당부했다. 절대로 아버지 옆에 묻히지 않겠다고. 엄마는 당신이 죽으면 화장하라고 했다. 그 이야기, ‘엄마가 죽는 이야기’는 아득히 먼 이야기라고 믿었다.
10월 가을볕이 쨍한 어느 날 작은 오빠네, 셋째 언니네와 같이 엄마를 모시고 수원 경기도박물관에 갔다. 가는 가을이 아쉬워 이곳저곳에 엄마를 끌고 다니며 사진도 찍고 맛있는 것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차에서 잠깐 졸았는데 집에 도착해서 공동현관으로 올라가는 대여섯 개 되는 계단을 올라갈 때였다. 엄마가 선 채로 뒤로 쓰러졌다. 엄마 앞에 올라가던 나는 “쿵!” 소리에 돌아보았다. 엄마는 쓰러져있었고 언니 오빠들은 “엄마!” 하며 달려들었다. 우선 오산에 있는 종합병원에 갔다. 검사 결과 고관절 골절이었다. 그 상황에서 머리를 다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다. 응급처치만 하고 구급차를 타고 다시 성빈센트병원으로 향했다. 엄마가 쓰러진 원인은 바로 요독(尿毒)으로 인한 쇼크였다. 의사가 애초에 경고한 대로 쇼크가 불시에 닥친 것이다. 고관절 수술을 하면서 엄마는 복막 투석을 위한 실리콘 관을 심는 수술도 같이하기로 했다. 뼈가 하나 부러진 다음에야 투석은 현실이 되었다.
투석은 혈액 투석과 복막 투석 두 가지가 있다. 혈액 투석은 인공신장기를 이용하여 혈액 속 노폐물 제거, 신체 내 전해질 균형 유지, 과잉 수분 제거하는 시술을 말하고 보통 1회 4시간, 주 3회 병원에 가서 해야 한다. 복막 투석은 뱃속으로 통하는 실리콘 관을 삽입하여 투석액을 교환하는 시술을 말한다. 복막 투석은 집에서 하루에 4번 6시간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엄마는 혈액투석실에서 본 환자들의 검게 변한 낯빛과 팔뚝에 툭툭 불거진 혈관을 보고 기겁을 한 후 복막 투석을 선택했다. 한 달 동안의 입원을 끝내고 엄마는 새로운 투석 생활을 시작했다.
복막 투석의 장점은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이다. 새 투석액을 넣고 6시간 동안 배 속에 있던 투석액을 빼는 시간은 30분 정도 걸린다. 그러나 복막 투석의 단점은 배에 구멍을 뚫어 관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그 부분이 균이 침투해서 복막염이 생길 수 있다. 또 투석환자는 체중 관리를 잘해야 하기에 짠 음식은 피해야 한다. 염분이 증가하면 체수분도 증가해서 체중이 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하는 혈액 투석과 달리 가정에서 하는 복막 투석은 환자나 보호자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병원에서 한 달에 한 번 진료를 받고 나면 박스터(Baxter:미국 시카고에 본사를 두고 있는 글로벌 건강관리 기업, 신장 질환 관련 복막 투석 및 혈액 투석 치료를 위한 제품이 주된 품목, www.baxter.co.kr)에서 투석액이 집으로 배송된다. 한 달 치 투석액 상자를 신발장 앞에 쌓아 두는 것으로 복막 투석은 시작된다. 차가운 투석액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워 배에 연결된 실리콘 관과 연결해 2,000cc의 새 투석액을 넣고 6시간 뒤 아까 배 속에 넣었던 투석액을 빼내야 한다. 이때 2,000cc보다 조금 많이 나와야 하는데 적게 나오면 안 된다. 엄마는 투석액을 잘 나오게 하려고 다리를 떨거나 배를 계속 주무르기도 했다. 30~40분 후 엄마 배 속에서 나온 투석액 무게를 꼭 재야 한다. 그리고 매일 해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배에 있는 출구 소독이다. 복막 투석 환자에겐 감염이 가장 무섭기 때문이다. 엄마는 투석만 하는 게 아니라 혈당과 혈압도 매일 확인하고 인슐린 주사도 맞아야 했기에 엄마를 모시고 살던 큰 올케와 특히 엄마랑 한 방에 지냈던 조카 채린이가 고생이 많았다.
투석을 시작할 때 의사는 우리에게 복막 투석 환자는 5년 정도 살 수 있다는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지금 생각하면 의사의 그 입을 꿰매고 싶을 정도로 무참한 말로 여겨지는데 그때는 사소한 사람의 사소한 말로 치부했다. 그러나 엄마만은 그 말을 중요한 말로 받아들였다. 엄마는 정말 투석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5년 동안 엄마와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엄마의 식단 조절이었다. 투석환자에겐 독이나 다름없었던 컵라면과 커피 믹스를 엄마는 끊을 수 없었다. 복막 투석만으로도 부종이 생겨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사진들은 푸석푸석 부어있는 것들뿐이다. 그러니 더욱이 라면은 엄마에게 해로운 음식이었다. 그러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쌀쌀해지는 아침에 엄마는 새우탕 컵라면을 먹고 입가심으로 커피 믹스를 마시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삼았다. 왜 그 음식들을 먹으면 안 되는지 셋째 언니와 나는 엄마에게 잔소리하곤 했지만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걸 알았더라면 내 손으로 물을 끓여 라면을 대접하고 커피를 타 드렸을 것이다.
또 복막 투석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한다고 했는데도 엄마에게 복막염이 잘 생겼다. 의사는 만약 엄마가 열이 나면 무조건 응급실로 오라고 했기 때문에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엄마가 열이 나면 119에 전화해서 성빈센트병원 응급실로 갔다. 처음엔 너무 놀라 혼이 빠졌지만 자주 가다 보니 기계처럼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들, 취객들의 난동과 각종 사고로 도떼기시장 같던 응급실에 친숙해져 갔다. 엄마와 응급실 다닐 때가 그래도 행복하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사진:네이버 블로그 'T의 사라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