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고향

by 수연길모

엄마는 6.25 전쟁 이후 외할머니가 재가하시는 바람에 몇 년간 외할머니와 떨어져 살 게 되었다. 그 몇 년 동안 엄마 없이 지냈던 기억은 엄마의 다른 정신적 기능을 마비시킬 만큼 엄청난 공포와 충격이었다. 이 상처로 인해 엄마는 세상의 엄마를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했다. 자식을 지키는 여자는 착한 엄마요, 자식을 버리는 여자는 나쁜 엄마였다. 엄마의 그 상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식을 지켜야 한다.’라는 종교를 낳게 했고 아마 엄마는 이 종교를 위해서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엄마는 죽을 때까지 자식을 버린 여자와는 말도 섞지 않았고 그런 여자를 증오했다.


그런데 큰올케 언니의 여동생 부부는 아이들은 아버지가 키우기로 하고 결혼 10여 년 만에 갈라서게 되었다. 그 후 부산에 살던 사돈은 우리가 사는 오산 근처로 이사를 와서 언니 집에 놀러 오기로 했다. 올케언니가 미리 이 사실을 엄마한테 일러주었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이혼하고 자식을 버린 엄마가 사람이다냐? 사돈은 우리 집에 한 발짝도 못 들어온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

“뭐라고요!?”


올케언니는 엄마와 대판 싸웠다. 내가 올케언니였어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단칼에 출입금지를 당한 자신의 여동생에 대한 엄마의 언행은 올케언니 자신을 향한 공격과 비난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셋째 언니와 내가 엄마에게 달려와 어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사돈의 처지를 이해시키고 올케언니와 화해를 위해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어린 시절의 그 상처가 타인을 향해 투사되었고, 이혼으로 인한 자식과의 이별은 사돈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조각일 뿐인데 엄마에게 그 작은 조각은 사돈의 전체를 덮고도 남는 것이었고 다른 조각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사돈에게서 자신을 버린 엄마를 느끼고 그 엄마를 증오했다. 엄마로 인해 상처를 입은 올케언니에게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엄마를 대신해서 사과하고 싶다. 언니 진짜 미안해. 답답한 우리 엄마 용서해줘.





삼정 송림 맨션에 살 때 셋째 언니가 엄마 속을 많이 썩였다.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버느라 제때 못 오고 20대에 찾아온 사춘기로 인해 언니는 월급날만 되면 월급과 함께 사라졌다. 언니가 가는 곳은 광주였고 그곳에서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여느 20대 아가씨들처럼 언니도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떨고 예쁜 옷도 사고 미용실도 갔다. 그렇게 신나게 한 달 월급을 다 쓴 다음 집으로 들어왔다. 문제는 언니의 월급이 없으면 살림이 휘청였다는 것이다. 돈도 문제였지만 다 큰 처녀가 자꾸 어디로 사라지니 엄마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러던 와중에 용한 점쟁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엄마는 답답한 마음에 점집에 가게 되었다. 근데 점쟁이의 입에선 예상 밖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 셋째 딸 그냥 둬도 문제없어요. 좀 있으면 셋째 딸 덕 좀 보겠네요. 조그만 기다려 보세요.” 점쟁이의 말에 엄마는 헛웃음을 치며 점집을 나왔다.


그러나 셋째 언니의 결혼과 함께 그 점쟁이의 예언은 들어맞기 시작했다. 언니는 승환이가 화상을 입었을 때 엄마에게 치료비를 보냈고 둘째 언니 큰딸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돈을 보내어 축하해 주었다. 이번 큰오빠의 오산행도 자동차 부품 대리점을 하던 셋째 형부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셋째 형부가 아는 사장님이 플라스틱 사출 금형(플라스틱 성형법의 하나로 플라스틱을 가열 융해시킨 후 고압으로 금형 내에 사출 하여 압력을 유지한 채로 냉각 고화시켜 성형하는 것을 말한다)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도와서 공장장을 해줄 믿을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형부는 큰오빠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이 소식을 들은 큰오빠는 며칠 동안 고민한 후 오산으로 가기로 했다. 결혼 전 월급날만 되면 사라지던 셋째 언니는 결혼 후 형제들이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해결사가 되었다.


빠듯한 살림에다 대가족의 이동이었기 때문에 나라도 부산에 남는 게 옳았다. 그러나 2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엄마 없이 혼자 사는 게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큰오빠에게 나도 오산으로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카들은 커가고 시부모님에 시누이까지 있는 그 상황이 올케언니는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까. 내가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었더라면 부산에서 자취하거나 시집이라도 빨리 갔어야 했는데 오산까지 따라가서 방 하나를 떡하니 차지하고 엄마 옆에 찰싹 달라붙어 살았다.


셋째 언니는 결혼 후 송탄에서 살다가 오산으로 이사 온 후 연년생 4살, 3살 자매를 두고 결혼 9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언니는 큰오빠네 집을 알아보기 위해 오산에 있는 부동산을 다니다 언니 집 주변에 싸게 나온 23평에 방 세 개짜리 1층 아파트를 발견했다. 셋째 언니네의 도움과 큰오빠가 돈을 짜내고 짜내어 그 집을 사게 되었다. 셋째 딸과 사위 덕분에 2001년 10월, 오산의 00 아파트 111동 101호는 엄마의 6번째 집이 되었다.


부산에서는 몇 년째 지하철 공사로 도로는 파헤쳐져 출퇴근 시간이면 교통체증의 지옥 속에 살았다. 또 여행 갔다 집으로 갈 때 부산으로 들어가는 IC를 지났다 하더라도 집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더 가야 했다. 그러나 오산은 그렇게 한적한 시골도 아니고 그렇게 복잡한 도시도 아닌 곳으로 차가 막혀있으면 무슨 일이 났나 오히려 놀라고, 여행 갔다 집으로 돌아갈 땐 오산 나들목을 빠져나와 10분 후면 우리 집이 보였다. 엄마는 창을 열면 논밭이 보이고 가끔 바람에 실려 오는 퀴퀴한 거름 냄새나는 오산을 좋아했다. 그런 오산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사진:오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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